영리병원 빗장이 풀리고 말았다. 원희룡 제주지사는 5일 오후 기자회견을 열고 녹지국제병원을 ‘조건부 개설 허가’를 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공공의료체계를 흔들게 될 영리병원이 제주에 개원하게 된 것이다.

제주도민 공론조사위 결정을 뒤엎고 국내 최초 영리병원인 녹지국제병원을 허가하려는 원희룡 제주지사의 발표에 의료연대본부와 공공운수노조는 일제히 성명을 내고 대정부 투쟁을 경고하고 나섰다. 제주 영리병원은 의료 민영화로 가는 전초전이 될 것인가?

영리병원 = 결국 주식회사

영리병원은 병원에서 발생한 수익을 투자자에게 배분할 수 있다. 주식회사형 병원으로도 불린다. 병원에서 발생하는 수익을 모두 병원에 재투자하는 비영리병원에 비해 의료의 질이 낮을 수 밖에 없다. 비용을 낮추기 위해 인력을 줄이고 돈이 되지 않는다면 의학적으로 필요한 부문도 구조조정할 가능성이 크다.

반면 돈을 잘 버는 진료과나 고가 시술을 확대해 의료비는 더 비싸질 것으로 예상된다. 당초 제주도민 공론조사위는 이러한 문제제기를 고려해 3개월 간 숙의토론을 거쳐 지난 10월 영리병원 불허 권고를 결정했다. 도민의 58.9%가 반대하는 여론조사 결과도 뒤따랐다. 하지만 원희룡 도지사는 제주도민의 권고와 사회적 합의를 뒤집고 국내 1호 영리병원을 허용하고 말았다.

 

의료관광 활성화가 가져온 공공의료 파괴

1990년대 후반 싱가폴, 태국, 인도 등 많은 아시아 국가들이 의료관광을 활성화시켰다. 이 국가들이 의료관광 사업을 하면서 겪은 문제점은 크게 두 가지다. 우수한 인력의 민간영리병원으로의 유출과 전체적인 의료비 상승이다.

태국의 사례를 보면 공공병원에서 민간영리병원으로 자리를 옮기는 의사 수가 2005년에 연간 7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공공병원에 부족한 의사 수는 6000명에 이른다는 통계가 있다. 또 외국인 환자가 몰려드는 특정 전공 선호 현상으로 인해 환자 치료에 필수적인 진료과들이 외면받고 있다.

인도에서는 결핵과 설사 질환으로 목숨이 위태로운 환자가 매년 100만 명이 넘지만, 정작 가장 많은 투자가 이루어지는 부문은 인공관절치환술, 녹내장수술 등이다. 인도에서는 1995년부터 2004년까지 인도 도심부의 입원료가 공공병원에서는 9퍼센트 증가했고, 민간병원에서는 36.5퍼센트 증가했다.

의료관광의 메카로 불리는 싱가폴에서는 2010년 1월부터 말레이시아의 병원을 이용했을 때도 싱가폴인들이 평소에 의료비를 지급받는 메디세이브 계좌를 이용할 수 있게 했다. 의료관광 사업으로 인해 싱가폴의 의료비가 지나치게 상승해서 가격이 싼 말레이시아 병원을 이용하라는 취지였다.

 

문재인 정부 영리병원 반대 약속은 어디로?

통계가 보여주는 의료관광 활성화의 폐해는 명확하다. 원희룡 지사가 주장하는 “진료과목 한정과 건강보험 등 국내 공공의료체계에는 영향이 없다”는 변명은 공허할 수 밖에 없다. 문제는 원희룡 지사의 독단적 판단이 아닌 현 정부와 공조를 통해 영리병원 도입이 단계적으로 이루어질 가능성이다.

원희룡 도지사는 “청와대와 정부 측과도 긴밀한 협의를 가질 예정”이라고 밝힌 바 있다. 정부가 그 동안 제주 영리병원 개설 허가와 관련 제주도에 협조해왔음이 공론 조사 과정에서 이미 드러났다. 문재인 정부의 영리병원 반대 약속의 진정성이 의심되고 있다.

더구나 정부는 기업의 돈벌이를 위해 의료의 공공성과 국민 안전를 위협하는 각종 규제 완화 법률의 통과에 열을 올리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문재인 대통령이 영리병원을 여전히 반대하고 있다면 원희룡 도지사가 국민의 뜻을 짓밟고 영리병원을 강행하지 못하도록 모든 행정적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 국민이 반대하는 국내 1호 영리병원이 제주도에 들어서게 된다면, 원희룡 도지사 뿐 아니라 문재인 정부에게도 그 책임이 있음을 엄중히 인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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