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직복직·체불임금지급·단체협약체결, 서면시장번영회지회의 600일 투쟁 이야기 ②

여기 사람 걸어 다니지도 못했어

파란불도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사람들

물 샐 틈 없는 인파로 가득 찬 땀 냄새 가득한 거리여 어느새 정든 추억의 거리여...

뿌연 헤드라이트 불빛에 덮쳐오는 가난의 풍경

술렁이던 한낮의 뜨겁던 흔적도 어느새 텅빈 거리여

12월 21일 저녁, 부산 부산진구 부전동 서면시장. 칼국수 식당이나 만두 가게를 향하던 시민들도, 시장 안을 오가던 상인과 시민들도 걸음을 멈추고 노래패 ‘길위에’가 부르는 <청계천8가>를 듣는다. 서면시장번영회지회 문화제가 마치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앞둔 서면시장의 문화 행사처럼 자연스럽게 시장 안에 스며든다. 누군가 ‘장사 방해 한다’며 항의를 할 법도 한데, 그러는 이가 없다. 이곳에서 실제 장사하고 있는 임대상인들과 서면시장번영회지회 사이에 투명한 시장 운영에 관한 일정정도의 공감대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고, 지금도 그 공감대가 아주 탄탄하다고 할 수는 없다.

“처음 노동조합을 만들고 집회를 할 때는 '빨갱이' '삼청교육대 보내야한다' '시장 망하게 한다'는 얘기를 하는 상인들이 많이 계셨어요. 상인들의 평균 연령이 50~60대 정도 되는데, 몇 십 년 동안 장사만 해온 분들이고 시장에서 노동조합이 처음이잖아요. 근데 요즘은 상인 분들이 '데모하러 왔나?' '집회하러 가나?' 이런 얘기를 하세요. 우리가 집회 신고를 하고 매주 수요일 정해진 시간에만 하잖아요. 우리가 법을 더 잘 지켜서 한다는 걸 알게 되신 거죠.” (김태경 지회장)

12월 21일 저녁, 서면시장번영회지의 문화제가 진행되고 있는 부산 부산진구 서면시장 / 출처:연정
12월 21일 저녁, 서면시장번영회지의 문화제가 진행되고 있는 부산 부산진구 서면시장 / 출처:연정

부산시 부산진구 부전동 서면시장이 위치한 서면역 인근은 ‘서면 1번가’로 알려진 부산의 이른바 '핫플레이스' 중 하나이다. 부산지하철 1.2호선 환승역이자 롯데백화점과 지하상가로 연결되는 서면역은 이른 저녁부터 많은 인파로 북적였다. 서면역 지하상가를 거쳐 지상으로 올라오면 떡볶이와 튀김을 파는 분식집부터 돼지국밥집, 칼국수집 등이 있는 ‘서면 먹자골목’이 있다. 조금 걷다보면 인근에 있는 휘황찬란한 건물들과 달리 지은 지 오래 되어 보이는 상가 형태의 4층 짜리 건물이 있는데, 여기가 서면시장이다. 이곳에 처음 오던 날, 서면시장 앞에서 ‘서면시장이 어디인가요?’ 물었던 기억이 난다. 양 옆으로 노점이나 단층 짜리 가게가 이어진 시장을 상상하고 왔기 때문이다.  

1960년대 초 이 자리에 임시 건물이 하나 지어졌다. 당시, 상인들이 부산시에 보증금을 내고 장사를 했던 이 임시건물이 서면시장의 시초로 알려져 있다. 그 건물을 철거하고, 1972년에 4층 건물을 지어 개설한 곳이 지금의 서면시장이다. (‘부산역사문화대전’ 홈페이지)

"옛날 고무공장 시대부터 하는데, 그때는 정말 잘 됐어요. 여기 사람 걸어 다니지도 못했어. 그때는 백화점도 마트도 없으니까 서면시장 하면 다 알아줬는데, 이제 다 죽어버렸어. 요새는 장사가 안 돼. 지금은 공장이 없으니까 먹고 살 것이 없어 니도 나도 장사로 뛰어 들어 버리니께 장사가 안 되는 거지."

서면시장에서 40년 넘게 장사를 해온 한 상인의 이야기다. 백화점도 마트도 없던 시절, 서면시장은 손님들이 줄을 서서 물건을 사가는 이 지역의 현대식 고급시장이었다. 상가 앞에는 노점이 꽉꽉 들어차 있었는데, 전두환 정권 때 이들을 쫓아내거나 잡아가기도 했다. 처음에 함께 장사하던 지금은 할머니가 된 상인들이 한 명 두 명 세상을 떠나 이제 몇 명 남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세월이 올 줄 몰랐다는 상인은 장사가 안 되지만 집에 있기 갑갑해서 사람 구경할 겸 나온다고 했다. 

최고 비싸고 좋은 땅에 건물을 못 짓는 이유

1990년대 초까지도 번창했던 서면시장은 1990년 중반 무렵부터 서서히 손님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인근에 롯데백화점이 들어선 이유도 있었지만, 설립 후 제대로 리모델링 등 건물 관리와 시장 활성화를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던 요인이 크다. ‘60년 전통’이라는 장점보다 ‘60년 노후’의 단점이 현실에서는 더 많은 영향력을 발휘하여, 오래 장사한 일부 음식점 등을 제외하고 손님이 많지 않다. 지자체의 지원 사업으로 청년몰도 생겼지만, 한산하기는 마찬가지다. 전통시장 시설 개선을 위해 정부와 지자체에서 지급하는 각종 지원금은 기가 막히게 잘 챙겨 받고 있는데도, 에스컬레이터 한 대 없는 노후한 화장실·계단·통행로 등 내부 시설과 전기·누수 문제가 계속 되는 건 왜일까. 

“여기는 세가 비싸. 백만 원이 넘어. 월세에다 번영회비니 뭐니 하면 120만원은 줘야해. 시장 안에가 전부 두 평 세 평이거든. 상인들이 다 각각이라서 파악이 안 되니까 여기 이 최고 비싸고 좋은 땅에 건물을 못 짓잖아.” (서면시장에서 40년 이상 장사해온 상인)

부산 서면시장 안 1층 식당가의 모습 / 출처: 연정
부산 서면시장 안 1층 식당가의 모습 / 출처: 연정

맞는 말이다. 서면시장이 있는 부전동은 땅값이 비싼 곳으로 유명하다. 이 금싸라기 땅에 이렇게 장사도 안 되는 노후한 시장 건물을 계속 세워두고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재건축 때문이다. 상가 소유주들은 언제가 될지 모를, 곧 될 거라 믿는 재건축으로 획득할 이권을 기대하며 ‘언젠가는 반드시 당첨되고야 말’ 복권처럼 상가를 움켜쥐고 있다. 심지어 9평 짜리 상가를 9개로 쪼개서 ‘한 평 사장’이라 불리는 투기세력 까지 서면시장 안에 들어와 있는 실정이다. 그 은밀한 거래를 허용하고 주도하는 이들이 서면시장번영회 회장단이다. 서면시장에 들어오는 점포 허가를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서면시장번영회에 신고하고 번영회의 직인을 받아야 한다. 기존 점포에 본인 지분을 넣는 것도, 공사를 하는 것도 번영회의 허가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엄청나네요. 여기는 ‘천원 짜리 변호사’가 와서 해결해 줘야 할 것 같아요.”

지난 가을 이곳에 처음 왔을 때, 4층 서면시장번영회 앞 옥상 서면시장번영회지회 천막농성장에서 그간의 과정을 듣다가 필자가 농담처럼 던진 이야기다. 그날 그 옥상이 운동장처럼 넓어보였다. 사실, 농담만은 아니었다. 서면시장은 법이 전혀 통하지 않는 주먹구구식 운영과 재건축과 관련한 이권 챙기기, 점포소유주들의 이해관계와 그 속에서 발생하는 임대상인들이 받는 피해, 각종 횡포·비리가 난무하는 곳이다. 근로기준법이나 헌법에 명시된 노동3권(단결권 ·단체행동권· 단체교섭권) 보장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다. 그 모든 것의 핵심에 서면시장번영회가 있다. 그 모든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는 점포소유주들이 돌아가면서 번영회 임원을 해오고 있다. 

두 명의 노동자가 600일 넘게 투쟁하게 된 배경이자 이유가 되는 지점이다. 다른 투쟁사업장들의 상황과는 다소 다른, 한마디로 만만치 않은 투쟁이다. 수임료 단 돈 천원에 ‘빽 없는’ 의뢰인들의 든든한 ‘빽’이 되어 명쾌하게 사건을 해결하고 못된 사람들을 응징하던 드라마 <천원 짜리 변호사의> ‘천변’(남궁진 분)이었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첫 취재를 갔던  날 골똘히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그 ‘천원 짜리 변호사’ 역할을 허진희 씨와 김태경 씨 두 사람이 하고 있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12월 8일 저녁, 서면번영회지회 집회에서 서면시장번영회의 민주화와 서면시장 정상화, 노동기본권 보장 등을 요구하는 참가자들 / 출처: 부산일반노조 서면시장번영회지회
12월 8일 저녁, 서면번영회지회 집회에서 서면시장번영회의 민주화와 서면시장 정상화, 노동기본권 보장 등을 요구하는 참가자들 / 출처: 부산일반노조 서면시장번영회지회

정관은 유리할 때만, 불리할 때는 ‘시장이니 그렇다’?

서면시장번영회는 1971년에 설립된 사단법인이다. 정관에 명시된 서면시장번영회의 설립 목적은 '시장 내에서 상업을 영위하고 있는 전체 상인의 상호간에 친목과 복리증진을 도모함으로써 사업의 번영과 발전을 기하는 한편 원만한 유통구조를 형성하여 시민에게 봉사하는' (서면시장번영회 정관 제3조) 것이다. 한마디로 번영회는 시장과 상인, 손님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얘기다. 

서면시장번영회가 해야 하는 일도 명문화 되어 있다. 번영회는 시장관리규정 제19조에 따라  ‘소방·방법·시장경비·광고 및 시장홍보 등의 필요한 사항, 점포관리에 관한 사항, 전기사용 및 전기시설물 관리에 관한 사항, 시장시설의 영선 미 유지보수에 관한 사항, 시장 관리를 위한 제반 운영관리비·제세공과금 및 각종 경비에 관한 부과와 징수 등에 관한 사항에 이르는 시장관리사무’를 수행하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시장 운영과 관련한 필수 업무를 하기 위해 번영회에 회장 1명·부회장 2명·이사 6명 등의 임원을 두고, 사무·주차·미화·경비 등의 실무를 하는 노동자들을 채용하게 하게 되어 있다.

부산 서면시장 건물 입구에 서면시장번영회 현판이 걸려있는 모습 / 출처: 연정
부산 서면시장 건물 입구에 서면시장번영회 현판이 걸려있는 모습 / 출처: 연정

"보통 '전통시장 영세상인' 이런 얘기를 하는데, 여기는 아닙니다. 서면시장 토지 공시지가가 평당 8천 20만원이에요. 근데 시장에서 실제 장사하는 소유주는 몇 명 없어요. 식당이나 물건 파는 상인들 다 세입자거든요. 임원은 점포를 소유하더라도 장사를 해야 시장 돌아가는 걸 알 수가 있는데, 소유만 하고 장사 안하는 임원들이 있어요. 그런 임원이 부동산 투기로 쪼개기하고 재건축이니 하면서 시장을 시끄럽게 하는 거죠.” (허진희 조합원)  

서면시장번영회에서 7년 넘게 회계 업무를 해온 허진희 씨의 이야기다. 서면시장의 상가 수는 3백 개인데, 이중 소유주가 직접 장사를 하는 비율은 10%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나머지 90%의 소유주는 세를 주고 월세를 받으면서 서울 등 외지에 거주하거나 다른 곳에서 장사를 하고 있다. 하지만, 서면시장번영회 회원은 이곳에서 실제 장사를 하고 있는 90%의 임대상인이 아니라, 이곳에서 장사를 하지 않는 이가 대부분인 점포소유주들이다. 점포소유주들만이 번영회 회원 자격으로 시장 운영에 관여하고 임원이 되고, 의결권과 투표권을 갖는다. 정관에 명시된 회원 자격이 '시장 내에서 점포를 가지고 상행위를 하는‘ 이라고 되어있기 때문이다. 서면시장과 관련한 모든 권한은 번영회 임원을 포함한 점포소유주들에게만 있고, 임대상인들에게는 아무 권한이 없다. 임대상인들도 번영회 회의에 참관 자격은 있지만, 감추어야 할 것이 많은 임원들은 이조차 막으려 한다. 하지만, 정관에 점포를 가진 동시에 ’상행위를 하는‘ 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이곳에서 실제 장사를 하지 않는 90%의 소유주들은 회원 자격이 없는 게 맞다. 서면시장번영회 회원으로 되어있는 이들 중 90%는 회원 자격이 없다. 

“번영회 정관은 본인들 유리할 때 따지는 거고요. 불리할 때는 '그냥 시장이니 그렇다' 회장단은 이런 논리에요. 실제 장사하고 있는 상인들이 보는 피해가 많아요. 근데 제 월급을 번영회 회장이 주는 게 아니잖아요. 이 시장에서 칼국수 밀고 물건 파는 진짜 운영비 내는 상인들이 제 월급 주는 거잖아요. 저한테는 그 상인들이 소중한 분들이에요.” (허진희 조합원)

서면시장번영회 회장단이 임대상인들의 피땀 어린 운영비로 법률비 등 노동조합 탄압하는 데 사용한 비용만 일억 원이 넘는다. 시장 번영이 없는 시장번영회, 시장 상인이 없는 시장번영회, 노동자의 권리는 당연히 없는 시장번영회. 점포소유주도 임대상인도 모두 회원으로 함께 울고 웃고 싸우며 애환을 나누는. 집안일보다 시장과 상인들을 위한 봉사를 더 많이 한다며 가족들에게 서운하다는 말을 듣는 회장이 있는 시장번영회는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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