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한 잔 분량의 시를 쓰며 평등사회를 늘 꿈꾸는” 조합원 시인
예비검속 희생자와 그 후손의 사연에 시를 쓰다

2014년, 정부는 4월 3일을 제주 ‘4·3희생자 추념일’로 지정했다. 정부는 “제주4·3사건 희생자를 위령하고 유족을 위로하며, 화해와 상생의 국민 대통합을 도모하기 위해 이뤄진 것”이라 밝혔다. 하지만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첫해인 올해, 국민의힘 주요 지도부 인사들과 함께 불참했다. 추념사를 대독시켰으나 그 내용마저도 비판받고 있다. 되려 국민의힘에서는 ‘격 낮은 기념일’ ‘김일성 지령설’과 같은 망언이 나오고, 보수단체들은 ‘빨갱이 폭도’ 등을 주장하며 역사적 사실을 폄훼하고 왜곡하고 있다. 민주노총은 매년 ‘제주4·3항쟁 정신계승 전국노동자대회’를 개최한다. 민주노총 화섬식품노조 조합원들은 매년 이 행사에 참여하면서, 제주4·3항쟁 당시 학살과 참상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기행을 하고 있다. 필자는 기행에 참여한 조합원(가족)들의 소감문을 입수해 이를 소개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예비검속희생자위령비건수기 @화섬식품노조
예비검속희생자위령비건수기 @화섬식품노조

김태운 씨는 민주노총 화섬식품노조 조합원이며 “지난 십년 간 하루 한편씩 시를 써온” 시인이다. 김 씨는 “차 한 잔 분량의 시를 쓰며 평등사회를 늘 꿈꿉니다”라고 소개했다.

김 씨는 4월 1일 오라리마을, 영묘원, 하귀 해안도로 위령비를 거치는 기행 일정에 참여했다. 그중에 제주북부예비검속희생자위령비에서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서 아래의 시를 썼다.


<사라져서 사라지지 않을 이름들>
- 김태운

이름 위에 이름이 엎어지고
이름과 이름이 씨줄 날줄로 뒤섞여 바다가 된
오목 렌즈의 어떤 섬에서는

나이 육십의 손자가
위령비에서 할아버지의 이름을
속으로 읽는다 만난 적 없는
이름의 시작점을 그 자리서 외고 또 왼다

위령비 차가운 돌에
한 자 한 자 이름을 새겨 넣었을
석공이 다루던 도구의 쩡쩡거림과
사람의 가슴에 이름을 새겨 넣기 위해
돌보다 단단해지려
가슴을 두드리고 두드렸을
어떤 백발 손자의

사라지지 않을 이름
그리고 비석들
그리고 비석들


김 씨는 해설사로부터 들은 설명을 회상하며 이렇게 전했다.

“1950년 7월과 8월에 제주에서는 이 예비검속이라 게 있었는데요. 이게 참 희한한 게, 죄를 저지른 사람을 구속 영장 발부받아 연행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을 것 같은 사람들을 미리 연행해 구금하는 이상한 집행 방식이었어요. 그런데 또 문제는 일제강점기 때 친일 행각을 하며 권력을 휘두르던 사람들이 군인과 경찰로 다시 활동하고 있었고, 친미 세력인 서북청년단도 이승만 정권의 파병에 의해 제주로 내려왔었단 말이죠. 상황이 그러니까 이 예비검속의 대상자가 그간 약자의 편을 들며 대들고, 함부로 군경에 덤비는 사람들이었던 거에요. 쉽게 말해, 마음에 안 드는 놈들 싹 잡아갔던 거죠. 그것도 한밤중에 와서 막 끌고 갔었던 거에요. 어딜 가는지 왜 잡혀가는지도 모르고 가족들, 가장들, 젊은 청년, 청소년들이 이 집 저 집에서 끌려갔던 거에요. 예비검속이라는 이유로. 그 예비검속에 희생된 분들을 기리는 위령비가 바로 이 위령비입니다. OOO. 이 분은 제 할아버님이에요. (말을 잇지 못해 잠시 정적, 듣고 있던 이들이 위로와 박수를 건넨다) 아버지가 날마다 한숨 쉬며 바닷가를 오갈 때 그땐 이유를 몰랐죠. 나중에야 알게 된 겁니다”

제주4·3 평화기행 중 제주북부예비검속희생자위령비에서 해설사가 설명하고 있다 @화섬식품노조
제주4·3 평화기행 중 제주북부예비검속희생자위령비에서 해설사가 설명하고 있다 @화섬식품노조

김태운 씨는 이 설명을 들으며 “얼굴도 한 번 본적이 없는 내 할아버지의 성함을 위령비에서 만나면 난 어땠을까?란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또 “수사님(해설사)이 눈물을 잠깐 삼키셨을 때... 그 사연을 전하기까지 얼마나 힘들고, 마음이 복잡했을까. 그분을 한 번 헤아려보고자 시를 쓰게 됐다”고 전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이 예비검속으로 처형됐다. 희생자는 3천여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부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있다.

제주4·3평화재단은 “경찰 공문에 따르면, 1950년 8월 17일 당시 제주도내 4개 경찰서에 예비검속된 자의 수는 1,120명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7월 29일, 8월 4일, 8월 20일에 각각 서귀포, 제주항 앞 바다, 제주읍 비행장, 송악산 섯알오름 등지에서 집단적으로 수장되거나 총살·암매장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제주4·3평화재단은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의해 2008년 10월 16일 설립된 공익적 목적의 법인이다.

SNS 기사보내기

관련기사

기사제보
저작권자 © 노동과세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