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홍의 청년 비정규노동
김기홍의 청년 비정규노동

노무사가 된 이후, 직간접적으로 가장 많이 접한 사건은 작가,AD,MD,PD,아나운서 등 방송노동자들의 문제였다. 당연히 이들은 모두 정규직이 아닌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불안감에 떨며 일하는 비정규직이다. 방송업계가 ‘비정규직 백화점’이라는 말이 그냥 나온게 아니라는 것을 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 편의 방송을 만드는데 필요한 여러 직종의 대부분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혼재되어 일하고 있으며, 정규직보다 비정규직이 더 많기도 하고, 심지어 모두 비정규직으로 이루어진 경우도 있다. 방송통신위원회가 지난해 12월에 발간한 보고서에 의하면, KBS와 MBC, SBS를 포함한 주요 지상파 13곳의 비정규직 종사자는 총 9,199명에 이르고, 2021년 신규 충원한 직원의 64%가 비정규직이었다고 한다. 물론 조사에 반영되지 않은 비정규직까지 포함하면 비율은 높아지겠지만, 위 결과만 보더라도 방송제작에 있어 비정규직의 의존도가 매우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대우는 높아지는 의존도와는 정반대로 가고 있다.

수도권과 지역방송국을 망라하고 다양한 직종의 방송노동자들이 찾아온다. 더 이상 방송일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찾아온 이들과 함께 법률분쟁에서 이겨나갈 때마다 그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하지만 또 한켠엔 이렇게 하나하나 싸워 이긴다고 해서 과연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은 커져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최근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수년 간 여러 현장에서 싸워왔던 당사자들이 직접 모여 방송비정규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동단체를 만든다고 한다. 단체의 이름은 ‘엔딩크레딧’이다.

‘엔딩크레딧’은 영화와 같은 방송프로그램이 끝난 후, 방송을 함께 만든 연기자와 제작자들의 이름이 소개되며 자막으로 올라가는 것을 말한다. 그동안 영화가 끝나면 자리에서 일어나기 바빴지 엔딩크레딧을 끝까지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방송노동자들의 사건을 여러 접하고 방송 한편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노력이 더 많이 들어간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이제는 되도록이면 한명 한명의 이름을 끝까지 보려고 노력한다.

근데 왜 하필 단체 이름을 ‘엔딩크레딧’으로 지었을까? 열악한 노동환경에서도 엔딩크레딧에 올라가는 자신의 이름을 보기 위해 버틴다는 사람들의 이야기이자, 방송 비정규직 문제를 끝내겠다는 엔딩의 의미도 있다고 한다. 멋지다. 이제 영화가 끝나고 엔딩크레딧을 끝까지 봐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것이 없다. 억울해 미치겠다.” 2020년 2월 4일 청주방송에서 14년간 일했던 이재학PD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남긴 말이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방송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잘못한 것은 오직 비정규직으로 채용된 것 외엔 없다는 것을. 굳이 찾는다면 정규직들이 쉬는 날에도 나와서 일을 하고, 재계약되기 위해서 남들보다 조금 더 열심히 일한다는 것? 정규직들과 똑같은 일을 함에도 대놓고 차별대우를 받고, 같은 직장에서 정규직보다 더 오래 일했음에도 방송이 개편된다고 쫓겨나는 1순위는 비정규직이다. 이러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더 이상 동료를 잃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한 마음이 더해져서일까, 쉽지 않은 논의과정 끝에 단체를 결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방송의 날을 맞이하여 오는 9월 1일, ‘엔딩크레딧’의 시작을 알리는 출범식이 여의도에서 열린다. 사실 단체가 만들어지는데 나는 1도 기여한 것 없다. 하지만 이렇게 나에게 할애된 지면을 통해서라도 염치없게 응원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단지 법률사건 당사자의 대리인으로 만났던 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방송업계의 문제를 끝내는 ‘엔딩크레딧’이자, 우리 사회에 만연한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는 ‘트레일러’가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노동과세계를 구독하는 다양한 직종의 조직된 노동자들에게도 ‘엔딩크레딧’에 대한 많은 관심과 응원을 부탁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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