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19일 금요일에는 민주노총 주관 2017 여성노동자 평화기행 행사가 열렸다. 민주노총 중앙 여성국 임수경 국장을 포함하여 총 13명이 참가했으며, 역사 기행 해설은 이 지역에서 40여년간 살고 있으며 근대역사학을 전공한 김현석 한국사연구자가 담당했고, “부평과 인천의 여성노동자들의 역사 탐방”을 중심으로 펼쳐졌다..

기행단은 당일 오전 10시 30분에 부평역에서 모여서 다음과 같은 동선으로 부평과 인천 기행을 수행하고 오후 5시에 인천역에서 해산했다.

부평 철도관사터 -> 부평역 주변의 여인숙 거리와 수저공장 터 -> 굴천포 주변 (예전 기지촌) -> 부평공원 사거리와 고가도로 -> 신촌의 ‘유니버셜’클럽 부지 -> 미쯔비시 공장 사택 -> 부평공원 -> 쌍굴

인천역 -> 8부두의 뱀골 마을과 북성포구 -> 도쿄시바우라 사택 부지 -> 동일방직 공장 (여성노동운동의 현장) -> 괭이부리말 마을 -> 인천역

이 기행문에서 김현석 역사연구사가 설명한 내용들은 따옴표 처리했다.

 

(3) 도쿄시바우라 사택 부지

복성포구 횟집 골목을 빠져나오면 큰 도로를 만난다. 그 도로를 마주하여 동일방직 공장과 도쿄시바우라 (도시바 기업의 전신) 사택 부지 그리고 사택 원형이 보존된 집이 위치해있다. 사택 부지의 골목들도 그대로 남아 있지만 사택들 대부분은 보수/수리되어 외형이 변형되었고, 유일하게 남은 이 사택은 회색 시멘트와 지붕 등이 일제시대에 지어진 상태 그대로 남아있어 한 눈에도 확 띄었다. 하지만, 이 집이 일제 시대 군수기업 사택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누가 알 수 있을까.

<사진 3. 도쿄시바우라 (도시바 기업의 전신) 사택 부지 그리고 사택 원형이 보존된 집>

 

(4) 동일방직 공장 (여성노동운동의 현장)

<사진 4-1. 동일방직의 강당>
<사진 4-2. 동일방직의 기숙사>
<사진 4-3. 동일방직의 의무동 (붉은색 표시)>

 

“ (도쿄시바우라 사택) 이 집을 뒤로 하고 등을 돌리면 곧바로 동일방직의 강당과 양 옆으로 왼쪽에 기숙사, 오른쪽에 의무동 건물이 보입니다. 의무동은 일제 시대 원형 모습 그대로이며 게다가 그 안에는 그 시대에 사용한 기자재들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

 강당 옆에 있는 저 기숙사 건물은 인천 노동자 파업을 이끌었던 역사적인 건물입니다. 동일방직은 일제강점기에는 동양방적이라는 이름의 회사였습니다. 이 회사는 1934년쯤 문을 열었고 (1972년에는 전국 섬유노조 동일방직 지부 조합원은 1천383명이었다. 그 가운데 1천204명이 여성이었다. 인터넷에서 검색함.) 신입사원들이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파업이 일어났습니다. 

이 시대 인천 공장들에서는 전부 파업이 일어나요. 원래 답사지로 계획했던 조선인촌주식회사 부지가 도원역쪽에 있습니다. 인촌 즉, 인으로 성냥을 만드는 공장이었는데 이 곳 임금은 너무 싸고 노동자들은 대부분 아이들, 14살부터 시작해서 20살까지 일할 수 있었습니다, 이 아이들에게는 미래가 안보여요, 노동 강도는 엄청나게 세고. 집에서 성냥의 재료인 인을 먹고 죽었다는 기사가 자주 납니다. 

그 시대 분위기를 보자면, 일제가 인천에 공장을 만들기 위해 1930년 대에 이 일대를 매립하는데, 공장을 지으려면 자본이 상당히 필요합니다. 일제는 본국의 대자본 기업들 자금을 들여오고 분공장을 만듭니다. 조선기계제작소, 미쯔비, 히타찌 등입니다. 하지만 이 분공장에서 일하는 조선인들의 민족적 비해, 피해도 심했고, 임금도 턱없이 낮아서 노동 계급 파업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적색노조운동자들이 계속 인천에 옵니다. 엄청난 수의 부두노동자, 정미소 노동자와 공장노동자들이 인천에 있었기 때문이죠. 동양방적도 그 파업 대상 기업 중 하나였습니다. 광복 후 동양방적에서 일하던 조선인 관리자가 이 회사를 불하받습니다. 이름은 동일방직으로 바꿨구요.” 

“ (나중에 동일방직 노조위원장이 된) 이총각선생이 취업을 해서 동일방직에 문을 열고 안을 들어가보니 그야말로 지옥이었다고 합니다. 방직기계가 쉼없이 돌고 있고, 실을 만들 때 생기는 먼지는 컴컴한 공장 안에서 부하게 떠있는데 앞이 보이질 않더랍니다. 이 공장에서는 기계를 오랫동안 빠르게 돌리는 것이 일종의 명예처럼 여겨지고, 기계를 잘 돌리는 직원에게는 상장 같을 것을 줬다고 해요. 기계는 쉼없이 돌고 공장 안에서 나올 수 없고, 이렇게 쉬지 않고 일하면서 몸은 축나는 것이지요. 임금은 턱없이 적고. 그러다가 “똥물사건”이 나면서 이총각선생은 공장에서 해고되구요. 한편, 인천 도시산업선교회는 이미 60년대부터 공장에 사람을 투입시켜고 그 곳 생활에 대해 보고서를 작성하게 했었습니다. 보고서는 공장 노동자의 임금, 공장 사람들 성품, 공장 분위기들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활동해오던 도시산업선교회와 공장에서 해고된 사람들이 손을 잡고 그 교회 지하에서 노동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고, 최근에 노동 착취에 대해 재판을 해서 일부 승소했습니다.”

동일방직 똥물사건: "10여명의 여공들이 똥물을 뒤집어쓰고 있었고 노조사무실과 사무장실 천장과 벽에 온통 똥물이 묻어 있었습니다. 또 몇몇의 여공들은 바닥에 누워 울고 있었습니다." 이 사진을 찍고 보관한 이기복 사장님의 회고다. 

 <1972년 전국 섬유노조 동일방직 지부 조합원은 1천383명이었다. 그 가운데 1천204명이 여성이었다. 그런데도 조합 간부는 회사 말 잘 듣는 기술직 남자들이 독차지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부녀부장이던 주길자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민주적인 여성 지부장으로 선출되었다. 노동조합은 자주적이고 민주적으로 바뀌어 갔다. 그러나 회사측은 노조 파괴 공작에 나섰고, 마침내 1978년 2월 21일 노조 대의원 선거가 있던 날, 회사 측에 매수된 남자조합원 행동대원들은 손에 들고 있던 똥물을 여성 조합원들에게 달려들어 뿌릴 뿐만 아니라 옷을 들추어 그 속에 집어넣고 강제로 입을 벌리고 쏟아붓기도 했다. 게다가 섬유노련은 이른바 ‘똥물 사건’으로 대의원대회가 무산되자  3월 6일 동일방직 노조를 사고지부로 처리하고, 농성 중인 이총각 지부장을 포함 4명의 노조 집행부가 “도시산업선교회와 관련이 있는 반조직 행위자”라며 제명했다. 노조원들은 결국 회사 밖으로 뛰쳐나갔다. 3월 10일 TV와 라디오로 생중계되고 있는 장충체육관의 노동절 행사 때는 76명의 조합원이 “우리는 똥을 먹고 살 수 없다”고 외쳐 생방송이 세 차례나 중단되었다. 3월 26일에는 동일방직의 정명자가 다른 회사 조합원 5명과 함께 50만 명이 모인 여의도 부활절 연합예배장의 단상으로 뛰어올라가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마이크를 탈취한 뒤 ‘노동3권 보장하라’, ‘우리는 똥을 먹고 살 수 없다’ 등을 외치다 전원 구속되었다. 동일방직 노동자는 이렇게 끈질기고 과감하게 저항했으나 결국 4월 1일자로 124명의 조합원이 해고되었다. 섬유노련은 4월 10일 해고자 명단을 블랙리스트로 만들어 전국의 각 사업장으로 보내 해고자들이 다른 공장에 취업하는 길까지 봉쇄해버렸다.> 김정형 저 <20세기 이야기> 중에서

“동일방직에 처음 입사하면 저기 (사진의 붉은색 표시 부분) 의무동에서 신체검사 및 오리엔테이션을 받습니다. 거기에서 통과가 되면 강당 옆에 있는 기숙사로 이동해서 살았는데, 이 기숙사에서 탈출하고 옥상에서 시위하고 그랬던 곳이구요. 의무동은 일제 시대 지어진 원형 그대로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문화재 지정 시도가 있었지만 불발되었습니다. 기숙사 건물도 근대 노동사의 의미가 큽니다. 이 두 개 건물들의 보존 가치는 매우 높습니다. 하지만 동일방직 측은 이 금싸라기 땅을 다 팔고 나가겠지요. 그러면 아파트가 들어설 것이고요.” 

동일방직 공장 담벼락을 따라 죽 걸어가니 정문에 다다랐다. 

<사진 4-4. 동일방직 정문과 동판>

 

“이 일대 공장 주변 사람들이 살던 곳이 아카사키촌과 괭이부리말 등입니다.”

우리 기행단은 동일방직 공장에서 길을 따라 올라가 언덕 위의 괭이부리말마을까지 답사하였고, 그곳에서 행사를 마무리했다.

이번 기행에서는 시간 배정 상 인천 월미도 및 아카사키촌/괭이부리말 등은 자세하게 답사하지못했다. 하지만 부평 미군부대와 기지촌 등의 역사 흔적을 자세한 설명과 함께 답사할 수 있어서 역사의 아픔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또한, 동일방직 노조탄압 사건은 기행 후 인터넷 검색으로 추가 확인했었는데, 여성노동자들의 삶과 노동권 보장을 위한 투쟁 등을 다시 한 번 되새길 수 있는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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