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성의 노동자 역사
박준성의 노동자 역사

전두환 정권 시절인 1985년 6월, 구로공단의 노동자 2500여 명이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동맹파업을 벌였다. 구로공단은 1960년대 말 박정희 정권이 조성한 수출 산업 공단 제1호 지역이었다. 구로에 들어선 1,2,3 단지가 가운데 가리봉동에 조성된 2단지에는 도시형 봉제공장이나 삼성, 효성물산의 대기업 의류제조업체 노동자 1만 7000여명이 일하고 있었다. 1984년 봄부터 여름 사이 2단지에 입주한 업체의 노동자들이 곳곳에서 민주노조를 결성하였다. 같은 지역에서, 여성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봉제업종과 전자산업이라는 비슷한 업종에서, 가혹한 노동조건에서 일한다는 동질감이 형성되어 있었다. 노동조합이 탄압받을 때 서로 도왔고 지역활동도 함께 벌였다. 1985년 임금인상투쟁 과정에서 해고된 노동자들이 4월 10일 ‘노동운동탄압저지투쟁위원회’를 만들었다. 6월 1일에는 ‘구로지역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노동조합을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했다.

1980년 동맹파업 이전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투쟁
1980년 동맹파업 이전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투쟁

각 노동조합에 자리 잡은 활동가들은 비공개 지역 소모임을 만들어 노동법을 학습하고 신문사설을 읽으면서 노동운동 상황과 한국사회 현실을 함께 고민하고 토론했다. 조합원들과 노조 간부들이 공장의 담을 넘어 일상적인 교류와 연대활동을 활발히 벌였다.

1985년 6월 22일 구로공단에 있는 대우어패럴 노동조합 김준용 위원장, 강명자 사무장, 추재숙 여성부장이 임금인상 투쟁 건으로 경찰에 구속되었다. 4월에 벌인 임금인상 투쟁 과정에서 쟁의조정법, 집시법, 폭력행위에 관한 법률을 위반했다는 이유였다. 조합 간부 8명은 불구속 입건되었다. 조합원 100여 명이 사측에 항의 방문하고 대의원들이 총파업을 결의하였다.

대우어패럴 간부들이 구속되던 날인 토요일 안양에 있는 기독교 원로원에서는 구로공단의 효성물산노조, 선일섬유노조, 가리봉전자 노조 강부와 조합원, 구로지역의 활동가와 해고노동자 190여 명이 합동교육을 받고 있었다. 대우어패럴 노동조합 간부들이 구속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음 날까지 한국노동운동사를 짚어보면서 대응책을 찾았다. 대우어패럴노동조합에 대한 탄압은 대우어패럴만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노조탄압의 첫 신호이기 때문에 자신들 모두에게 닥쳐올 문제라고 인식하였다. 그 자리에 참여했던 노동자들은 ‘70년대 선배노동자들이 치열하게 잘 싸웠다, 그러나 단위노동조합이 작업장 별로 따로 따로 싸우다가 1981년 1982년 전두환 정권의 노조 탄압에 의해 모두 따로 깨지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역사의 경험을 되새기겼다. 함께 연대투쟁으로 대우어패럴 노동조합 탄압에 대응할 것을 모색하였다. 간격을 두고 차례로 당하지 말고 한꺼번에 싸우자는 결의를 하였다. 효성물산, 선일섬유, 가리봉전자 등 3개 노조는 6월 24일 오후 2시에 연대파업에 들어가기로 결정하고 효성물산노조 김영미 위원장을 연대투쟁위원장으로 선임했다. 사무국장은 선일섬유노조 김현옥 위원장, 홍보국장은 청계피복노조 김영대 사무국장이 맡았다. 먼저 구속된 대우어패럴 김준용과 연대투쟁위원회에서 책임을 맡은 김영미, 김영대 세 사람 모두 ‘청계’ 출신이었다.

6월 24일 오전 대우어패럴 조합원 350여 명이 파업에 돌입하였다. 오후에 효성물산, 선일섬유, 가리봉전자 노동자들이 구속자 석방과 노동운동 탄압 중지를 요구하며 연대파업에 돌입하였다. 다음날 세진전자, 롬코리아, 남성전기 노동조합이 파업지지 농성투쟁을 합류하였다. 6월 26일에는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과 민주화운동청년엽합(민청련),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 한국노협과 청계피복노동조합 등 22개 단체 50여 명의 대표들이 청계피복노동조합 사무실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농성을 시작했다.

22개 단체 대표자들이 지지 농성하는 청계피복노동조합 사무실
22개 단체 대표자들이 지지 농성하는 청계피복노동조합 사무실

6월 27일 효성물산과 청계피복노동조합 조합원들이 노동부 중부사무소를 점거하고, 5일째인 6워 28일에는 부흥사와 삼성제약 노동조합이 가세하여 구로연대투쟁 사업장은 10개로 늘어났다. 구로노동자들이 동맹파업을 하며서 다음과 같은 요구사항을 내세웠다.

1. 정부당국은 대우어페럴노동조합 위원장 김준용 동지를 비롯한 구속자 전원을 즉각 석방하라!

2. 정부당국은 민주노조운동을 짓밟는 모든 악법(집회시위법, 언론기본법, 노동악법 등)을 즉각 철폐하라!

3. 정부당국은 부당해고자 전원을 즉각 복직시켜라!

4. 정부당국은 정책적인 어용노조 설립을 즉각 중단하라!

5. 정부당국은 임금동결정책을 포기하고 최저생계비를 보장하라!

6. 민주노동조합 파괴에 앞장서 온 조철권 노동부장관은 즉각 물러가라!

파업 농성을 벌이는 대우어패럴 노동조합 조합원들
파업 농성을 벌이는 대우어패럴 노동조합 조합원들

전두환 정권과 자본은 구로 노동자들의 투쟁을 그대로 두고 보지 않았다. 자본측은 단전, 단수에 음식까지 차단했고 경찰은 농성장을 포위하고 출입을 통제했다. 6월 29일 대학생 18명이 식량과 의약품을 들고 대우어패럴 농성장에 들어간 것을 빌미 삼아 회사에서는 관리자와 고용한 깡패들로 구성된 구사대 들을 동원하여 출입문과 벽을 부수고 들어와 노동자들을 강제로 끌어냈다. 6월 30일 대우어패럴 노동자 80여 명이 마지막으로 해산 당하면서 구로동맹파업은 막을 내렸다. 이 동맹파업으로 노동자 43명이 구속되고, 37명이 불구속 입건, 700여 명의 강제사직과 해고를 포함 13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생존권을 박탁당했다. 동맹파업에 참가하지 않았던 노동조합들도 무사하지 못하고 해산당했다. 구로동맹파업이후 해고자들은 구로노동자연대투쟁연합을 만들어 노동운동을 이어나갔다.

전두환 정권의 탄압 아래서도 구로지역 노동자들이 연대투쟁위위원회를 만들어 동맹파업을 벌이고 지지연대투쟁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구로동맹파업은 노동운동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구로동맹파업은 ‘우리 노조만 잘 지키면 된다’는 조합주의나 기업별 노조의식의 한계를 뛰어넘어 연대의 정신을 실천으로 보여주었다. 지역노동자연대운동의 중요성을 알려주었다. 노동3권보장과 노동부장관 퇴진 같은 정치적 요구를 내세웠으며, 노동조합에 바탕을 두면서도 대중적인 정치투쟁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가 있다.

구로동맹파업은 이후 등장하는 비합법.비공개 노동운동 단체를 만들어 내는 계기가 되었다. 정치 선동과 정치투쟁을 중요한 임무로 설정한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의 결성을 필두로 인천 안양 등 여러 곳에서 비슷한 단체들도 결성되었다. 또한 구로동맹파업은 1987년 7.8.9 노동자대투쟁과 그 뒤 노동자 연대활동 연대투쟁의 밑거름이 되었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노동과세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