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성의 노동자 역사
박준성의 노동자 역사

1970년 전태일 열사는 “근로자도 인간이다”고 외치며 자기 몸에 불을 질렀다. 1986년 박영진 열사는 죽음을 앞두고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유언처럼 남겼다. 1980년대 중반부터 ‘노동해방가’가 노동자들 술자리에서 불려졌다. 간간히 구호 속에도 노동해방이 등장하였다. ‘노동해방가’의 원곡은 1979년 유환희가 작사 작곡한 ‘천지개벽가’였다.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기관지 ‘민주노동’에 원곡이 실리면서 알려졌다. 곧 ‘노동해방가’로 바꿔불리기 시작하여 1985년 민중문화연구회에서 펴낸 <<동트는 산하>>에는 노동해방가로 악보가 실려 있다.

노동해방가의 원곡 ‘천지개벽가’
노동해방가의 원곡 ‘천지개벽가’

노동해방가의 노랫말처럼 ‘강제와 감시 속에 우울하고 고통에 찬 죽음의 고역 같은 노동‘에서 해방되고, 낡은 체제를 깨부수고 새로운 세상을 이룩하려는 ’노동해방‘이라는 말이 일부 노동자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1988년 5월 1일 연세대에서 열린 세계노동자의 날 기념 노동3권 쟁취 수도권 노동자대회의 중심 구호는 “세계노동자의날 정신 계승하여 노동해방 쟁취하자!!”였다.

1988년 5월 1일 연세대에서 열린 세계노동자의날 기념 노동3권 쟁취 수도권노동자대회. 출처=사진과 함께 보는 노동자역사 알기
1988년 5월 1일 연세대에서 열린 세계노동자의날 기념 노동3권 쟁취 수도권노동자대회. 출처=사진과 함께 보는 노동자역사 알기

1988년 11월 13일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열린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및 노동악법 개정 전국노동자대회’에서 ‘노동해방’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였다. 대회장은 “계승하자 열사 정신! 철폐하자 노동악법” “노동운동 탄압하는 군부독재 타도하자!” “열사정신 계승하여 노동해방 쟁취하자!”는 구호로 가득 찼다. 선서식을 끝낸 뒤 노동자들 40여 명이 연단 위로 뛰어 나갔다. 선봉대 노동자들과 인천 세창물산 노동자들이었다. 도루코 면도날을 손에 들고 손가락에 금을 그어 흐르는 피로 하얀 광목 위에 혈서를 썼다. 피로 쓴 ‘노동해방’ 네 글자가 노동자들의 가슴에 새겨졌다.

여의도 국회의사당까지 이어지는 5만여 노동자, 학생, 시민의 행진 대열을 노동해방 깃발이 이끌었다. 이미 1920년대 선배노동자들이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을 결성하면서 강령 제1조로 “노농계급을 해방하고 완전한 신사회를 실현할 것을 목적으로 함”을 내세웠다. 1930년대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에서도 ‘노동자들이 해방되는 새로운 사회 건설’이 노동운동의 방향과 목표였다. 그러한 지향은 1945년 11월에 결성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로 이어졌다. 한국전쟁 이후 분단이 고착화하는 과정에서 전평과 함께 변혁적 노동운동도 맥이 끊겼다.

사라진 것 같던 ‘노동해방’이 증발하듯 소멸 된 것은 아니었다. 몇 십 년 동안 역사의 밑바닥에서 소생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역사 속에 남아 있던 흔적을 기억하고 있던 사람들이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였다. 겉으로 흘러나와 샘이 되고 도랑물을 이루더니 개울물을 만들었다. 1989년에는 <노동해방문학>이 창간되었다.

1987년 7.8.9 투쟁을 겪은 노동자들은 1988년, 1989년 투쟁의 성과를 모아 1990년 1월 22일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을 만들었다. 성균관대 수원캠퍼스 대의원 대회장 벽에 “건설 전노협 쟁취 노동해방” 구호를 크게 써붙였다.

1990년 1월 22일 전노협 창립대회장. 출처=사진과 함께 보는 노동자역사 알기
1990년 1월 22일 전노협 창립대회장. 출처=사진과 함께 보는 노동자역사 알기

대회장에 ‘전노협 진군가’(김호철 작사 작곡)가 울려퍼졌다.

     새날이 밝아 온다 동지여 한발 두발 전진이다
     기나긴 어둠을 찢어 버리고 전노협 깃발아래 총진군
     잔악한 자본의 음모 독재가 판쳐도
     새 역사 동트는 기상 최후의 승리는 우리 것
     총 파업 깃발이 솟았다 한발 두발 전진이다
     노동자 해방의 그날을 위해 이제는 하나다 전노협

2절은 “노동자 주인 될 그날을 위해 이제는 하나다 전노협”으로 끝난다. 노동자가 주인되는 ‘노동해방’은 전노협 깃발에 쓰여진 ‘평등사회 앞당기는 전노협’과 함께 전노협을 상징하는 말로 자리를 잡았다. 전노협 창립선언문이나 강령에 ‘노동해방’이 공식적으로 기명되지는 않았다. 전노협 시절 전노협 소속 노동자들에게 노동운동의 방향과 목표가 무엇이냐고 설문조사를 했다면 아마 70%이상이 ‘노동해방’이라고 대답하지 않았을까. 1946년 9월 10일 미군정 공보부가 8천여 명을 대상으로 ‘미래의 한국통치구조에 관한 여론조사’를 했다. 결과를 보면 사회주의 70%, 공산주의 10%, 자본주의 13%, 모름이 7%였다. 그때 70%가 원했던 ‘사회주의’에 대한 상은 똑 같은 것이 아니었다. ‘노동해방’도 비슷했다.

1990년 전후해서 노동자들의 머리띠와 노래, 구호, 깃발 속에 담겨 있던 ‘노동해방’이 무엇을 뜻하는지 합의된 적은 없다. 암묵적으로 노동운동이 나가야 할 방향이자 노동자들의 꿈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노동해방가’ 가사처럼 ‘강제와 감시 속에 우울하고 고통에 찬 죽음의 고역 같은 노동에서 해방’되는 것에서부터 막연하지만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 ‘노동자 주인 되는 세상’, ‘노동자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으로 이해하기도 하였다. ‘자본의 억압과 착취를 벗어나 임금 노예로부터 해방’되는 상태를 노동해방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전노협의 정신이라 일컬어지던 ‘노동해방’은 민주노총의 건설과정에서 노동운동의 사상과 지향으로 자리 잡지 못하고 밀려났다. 1997년 IMF 구제금융 상황 이후 ‘신자유주의’를 앞세운 자본의 전면적인 공세를 막아내는 방패와 창으로 쓰이질 못했다. 한 때 수없이 나부끼던 노동해방 깃발도 자취를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민주노총의 창립선언문, 선언, 강령 어디에도 ‘노동해방’은 보이지 않는다. 16개 가맹 조직 가운데 공공운수노조, 보건의료노조, 서비스연맹, 민주일반연맹에만 선언이나 강령에 과거의 흔적처럼 이름이 새겨져 있을 뿐이다.

‘노동해방’이라는 노동운동의 지향은 100년이 넘는 노동자 투쟁이 만들어 온 역사의 산물이었다. 지금도 개별적으로는 여전히 노동해방을 자기 존립의 근거이자 삶의 지표로 삼고 있는 노동자, 활동가, 노동자 조직이 있다. 생택쥐페리는 “만일 당신이 배를 만들고 싶다면, 사람들에게 목재를 가져오게 하거나, 일을 지시하고 일감을 나눠주는 일은 하지 마라, 대신 그들에게 저 넓고 끝없는 바다에 대한 동경심을 키워줘라‘고 했다. 한 시대 노동자들에게 ’바다에 대한 동경심‘ 같은 것이 노동해방이었다. 자본으로부터 ‘노동의 소외’를 극복할 뿐 아니라 고역 같은 ‘노동으로부터 벗어나는 해방’은 여전히 노동자들이 지향해야 할 ‘불온한 꿈’이며 새로운 세상의 핵심이다. 1925년 5월 1일 동아일보에 실린 한 편의 만평에서 보여주는 노동자가 앞장서서 자본주의 세계의 억압과 착취의 장막을 걷어제치고 만들어낼 ‘자유세계’이기도 하다.

출처=1925년 5월 1일 동아만화
출처=1925년 5월 1일 동아만화

민주노조운동의 역사에서 ‘노동해방’은 노동운동의 지향과 목표로 공개적으로 합의한 적도 없고 그렇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폐기되지도 않았다. ‘노동해방’은 역설적으로 노동해방을 대신할 민주노조운동의 대안의 꿈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의 출발점이 된다. 노동자들에게 ‘노동해방’이 여전히 자신들의 꿈이라면 꿈에서 깨어나야 현실이 되고 실천으로 실현할 수 있는 목표가 된다. 얼어붙은 땅을 녹이고, 황무지를 개간해야 움켜쥐고 있던 씨앗을 뿌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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