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성의 노동자 역사
박준성의 노동자 역사

 

민주노총 창립
1991년말 사회주의 소련연방이 해체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서 터져 나오는 문제들도 여전히 이어졌다. 노동자들의 생존권과 생활권은 끊임없이 위협받고 있었다. 노동자들의 투쟁은 멈출 수 없었다. 한국노총과 경영자총연합은 93년 노-경총 임금합의 단행하였다. 이를 거부하고 공동투쟁을 조직하면서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전노대)’를 건설하였다.

1994년 6월, ‘전국지하철노조협의회’(전국철도기관사협의회, 서울지하철, 부산지하철)가 연대파업투쟁을 벌였다. 한국통신 노동조합의 민주화, 조폐공사 노조의 파업투쟁이 이어졌다. 민주노조운동은 공공부문으로 확대되었다. 공공부문 노동자들은 94년 11월에 142개 노조, 21만 조합원을 포괄하는 ‘공공부문 노조 대표자회의’를 건설하였다.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로 결집한 민주노조운동은 1994년 11월 13일, ‘민주노총준비위원회’를 공식 발족하였다. 1995년 11월 11일 연세대 강당에서 전국노동조합총연맹을 창립하였다. 창립 대의원 대회 자리에서 1970년대 선배노동자들이 “내 살아 생전에 유신헌법과 4.13호헌조치를 지지한 어용 한국노총이 아닌 민주노조운동의 전국적 구심이 건설되는 모습을 보고 죽을 수 있을까 했는데 보게 되네”했던 조직이다.

1995년 11월 11일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창립 대의원대회. 사진=박준성
1995년 11월 11일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창립 대의원대회. 사진=박준성

민주노총에는 15개 산업별(업종) 조직과 8백 61개 노조 조합원 41만 8154명이 가입하였다. 출범 당시에는 전체 조직노동자의 1/3, 전체 노동자의 5%에 미치지 못하는 규모였다. 민주노총의 창립으로 제3공화국 이후 처음으로 복수노총 시대가 열렸다. 민주노총 창립선언문에서 “생산의 주역이며 사회개혁과 역사발전의 원동력인 우리들 노동자는 오늘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의 전국중앙조직,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의 창립을 선언한다”고 하였다. 마지막에 “자! 자본과 권력의 어떠한 탄압과 방해에도 굴하지 않고 전국민주노동조합연맹의 깃발을 높이 들고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이 보장되는 통일조국, 민주사회 건설의 그 날까지 힘차게 전진하자!”고 결의하였다.

민주노총 창립선언문
민주노총 창립선언문

96-97 노동법 개정투쟁
1993년부터 시작된 김영삼의 ‘문민정부’와 자본 진영은 노동시장을 유연화하고 노동자 사이에 경쟁을 부추겨 노동조합을 힘을 빼려고 ‘신경영 전략’과 ‘신노사문화’를 확대하였다. 경총을 비롯한 자본가 단체들은 노동운동 진영의 요구인 복수노조를 허용하는 대신 정리해고제, 변형근로제, 쟁의 제한 규정들을 보상으로 요구하였다.

권력과 자본의 공세에 맞서 민주노총은 자주적 단결권 쟁취(노동3권)와 개별적 근로관계법 개악 저지를 노동법 개정의 핵심 요구로 내세웠다. 민주노총은 1996년 7월 11일 단위노조대표자수련대회를 열어 총력투쟁을 결의했다. 몇 달 동안 교육, 선전, 총파업 결의, 쟁의행위 찬반투표, 노개투 실천단 구성, 리본 달기, 현수막 걸기 같은 다양한 대중사업을 벌이면서 철저하게 총파업을 준비했다. 그 가운데는 1조합원 1교육도 들어 있었다. 민주노총의 역사에서 실제로 총파업을 성사시키기 위해 이때처럼 정성을 쏟아부은 준비는 이후로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준비 없는 선언적 총파업은 뻥파업이 되기 일수였다. 노동법 개악에 맞선 총파업 준비와 투쟁은 창립한지 1년 밖에 안된 민주노총의 조직력을 높이는 방편이기도 했다.

1996년 12월 26일 새벽 6시 신한국당의원 154명은 자기들끼리 임시국회를 열어 7분만에 노동법과 안기부법을 비롯한 11개 법안을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노사관계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노동법을 개악한 것이다. 변형근로시간제, 정리해고제를 허용하여 노동자들의 착취를 강화하고, 대체근로제, 무노동 무임금, 전임자 임금 지급 철폐, 해고자의 조합원 자격을 제한하여 노동조합의 힘을 약하게 만들려고 했다.

민주노총은 곧바로 총파업을 선포하고 투쟁에 들어갔다. 지도부는 미리 명동성당에 천막을 치고 삭발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12월 26일 85개 노조 14만명, 12월 27일 165개 노조 20만명, 12월 27일부터는 한국노총도 파업에 참가하여 총 658개 노조 36만5천여명의 노동자가 총파업에 동참했다. 12월 28일 민주노총의 175개 노조 21만8천여명이 참여하여 민주노총의 1단계 총파업투쟁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1996년 12월 30일 노동법 개정 총파업 당시 명동성당 집회. 사진=금속노동자 제공
1996년 12월 30일 노동법 개정 총파업 당시 명동성당 집회. 사진=금속노동자 제공

해를 넘겨서도 총파업의 열기는 사그러 들지 않았다. 1997년 1월 6일 민주노총 2단계 총파업에 150개 노조 19만여명의 노동자들이 참가하였다. 1월 15일 민주노총 3단계 총파업에는 431개 노조 37만여명이 참가하였으며, 한국노총도 1510개 노조 37만 8천명이 파업에 참여하였다. 이날 총파업이 최고조에 올랐다. 전국에서 공권력과 직접 대결하는 양상을 보였다. 총파업투쟁을 지지하는 민중연대도 서서히 확대되고 있었다.

노동법 개정 투쟁이 최고조에 오른 1월 17일에 민주노총 투쟁본부는 제10차 대표자회의를 열어 3단계 총파업을 18일까지 진행한 뒤 전면파업을 중단하고 ‘수요파업’으로 바꾸겠다고 결정하였다. 내부 동력의 소진, 국민여론의 존중이 전환의 명분이었다. 20일 넘게 전개된 정치총파업투쟁이 한 단계 더 비약할 수 있는 순간에 사실상 총파업 투쟁을 접었다. 1월 21일 정부·여당이 노동법 재개정과 민주노총 지도부에 대한 구속영장 철회 방침을 밝혔다. 민주노총도 전면파업을 철회하고 수요파업으로 전환해 총파업투쟁이 마무리단계에 들어섰다.

3.1운동이나 ‘4월혁명’ ‘6월항쟁’은 전국규모의 민중항쟁이 노동자 투쟁을 이끌었다. 해방후 전평이 지도한 1946년 9월 총파업은 3.1운동 이후 최대규모의 민중항쟁인 10월항쟁을 불러 일으켰다. 96-97년 노동법 개정투쟁은 노동자 총파업투쟁이 민중연대 투쟁을 이끌어 내어 노동자 민중의 힘으로 당면의 요구를 쟁취할 수 있는 기회였다.

‘수요파업’으로 바뀐 뒤 1월 26일 양대노총 공동으로 ‘날치기 노동법·안기부법 무효화와 민주적 노동법 개정을 위한 전국노동자대회’를 열었다.

96-97 노동법 개정투쟁 전국노동자대회
96-97 노동법 개정투쟁 전국노동자대회

그러나 공장과 거리에서 이루어지던 노동자 정치의 공간은 국회로 이전되었다. 개정의 주체도 투쟁하는 노동자와 노동자 조직이 아니라 ‘정치권’으로 넘겨주어었다. 여야 협상이 막바지에 접어든 2월 28일 민주노총은 4단계 시한부 총파업을 벌였다. 투쟁의 열기가 이전 같지 않았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3월 28일 종묘집회에서 노동법 문제를 대선에서 심판하겠다고 선언하고 총파업을 마무리하였다. 노동자 정치를 선거로 축소시키는 결정이었다.

4단계에 걸쳐 진행된 민주노총 주도의 총파업투쟁은 한국전쟁 이후 가장 큰 정치적 총파업투쟁이었다. 한 달 넘게 계속된 총파업 과정에서 한 번 이상 총파업에 참가한 민주노총의 노동조합 수는 531개, 조합원수는 40만 4054명에 달했다. 총파업에 참가한 노조와 조합원수의 누계는 3422개 노조, 조합원 387만 8211명, 1일 평균 파업규모는 163개 노조 184,498명으로 집계되었다.

민주노총은 4단계까지 이어지는 총파업투쟁을 이끌면서 합법 조직은 아니었어도 그에 못지않은 사회적 지위를 얻었다. 노동법 개정 투쟁은 조직된 노동자들이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사회세력임을 보여주었다. 96.97 노동법개정투쟁에 참여했던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세계적 규모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대해 저항하고 있다고 인식하지는 못했지만 침묵하고 있던 전세계 노동자들에게 당당하게 맞서 싸울 수 있는 힘과 희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96-97년 노동법개정 총파업으로 국회에서 통과되고 대통령이 서명한 법률을 일단 폐기시키는 성과를 얻었다. 요구의 전면적인 관철이 아니라 상급단체의 합법화와 정리해고제의 2년 유예 수준이었다. 개정노동법에는 교원.공무원의 단결권은 담겨 있지 않았다. 변형근로시간제, 공장점거 파업이나 비공식파업금지, 무노동 무임금, 공익사업장 직권 중재, 노조위원장 직권조인 승인 같이 노동자들의 투쟁과 아래로부터의 조직을 약화시키는 내용을 저지하지 못하였다. 총파업의 준비와 참가자에 비해 끝내기를 포기한 꼴이었다. 1997년 IMF 외환위기 상황 이후 민주노총은 신자유주의 광풍 속에서 몰아닥치는 자본의 구조조정과 정리해고, 노동유연화 공세를 막아내야 할 지난한 과제를 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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