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5월 ‘분신정국’과 5월 투쟁

박준성의 노동자 역사
박준성의 노동자 역사

전노협이 출범한 1990년 1월 22일 민정당과 민주당, 공화당이 야합하여 합당을 발표했다. 새로 탄생한 거대 여당은 전노협 지도부 구속 수배, 탈퇴 유도 공작, 전노협 가입 사업장에 대한 업무조사와 공권력 투입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전노협을 깨려고 나섰다.

그동안 ‘건설 전노협!’을 외쳤던 구호는 곧바로 ‘사수 전노협!’으로 바꾸어야 했다. 출범 5개월 사이에 1백여 명이 구속되고 2백여 명이 고소, 고발당했으며, 1백여 명이 수배당했다. 전노협 사업장에 대한 경찰투입이 18번씩이나 계속되었다.

1990년 4월 KBS 노동자들의 ‘방송민주화’ 투쟁에 MBC, CBS 노동자들이 연대투쟁을 벌였다.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 골리앗 고공농성을 벌일 때는 현대자동차 노동자들과 마창노련이 동맹파업을 벌였다. 5월 1일 전노협은 ‘경찰병력 철수’ ‘노동부 장관퇴진’을 요구하며 전국총파업투쟁으로 대응하였다. 투쟁을 통하여 전노협은 대공장과 결합을 강화하고 조직을 사수하였다. 12월 9일 대기업 노동조합은 ‘연대를 위한 대기업노조회의’를 결성하였다.

1991년 4월 26일 명지대 강경대 학생이 시위 도중 백골단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살해당했다. ‘고 강경대열사 폭력살인 규탄 및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범국민대책회의)가 결성되어 규탄집회와 가두시위가 전개되는 과정에 박승희·김영균·천세용의 분신이 이어졌다. 5월 1일 메이데이 투쟁, 5월 4일 ‘백골단 전경 해체와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궐기대회’가 열렸다. 5월 6일에는 1991년 2월 10일 의정부 다락원에서 대기업노조회를 하다 구속된 한진중공업노동조합 박창수 위원장이 안양병원에서 치료를 받던중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5월 9일 전국에서 ‘민자당 해체와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결의대회’가 열렸다. 김기설·윤용하·김철수·이정순의 잇따라 분신하였다. 5월 14일 강경대 장례식은 경찰의 저지로 무산되었다. 5월 18일 5·18국민대회와 2차 강경대 장례식이 치러졌다. 전국 81개 시·군에서 40여만 명이 참가하여 5월 투쟁이 정점에 이르렀다. 5월 20일 새벽 광주에서 권창수가 경찰의 곤방에 맞아 의식불명 상태로 병원에 실려 가고, 5월 25일 성균관대 김귀정 학생이 시위 도중 목숨을 잃었다. 1991년 5월 전국적으로 2,300여 회의 집회가 열렸고, ‘해체 민자당, 퇴진 노태우’라는 구호 아래 대규모의 시위들이 잇따라 터져 나왔다. 6월 3일, ‘정원식 총리서리 계란 투척 사건’이 발생하고 6월 광역의회 선거에서 민자당의 압승하면서 1991년 5월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한진중공업의 노조 민주화와 박창수 위원장의 죽음
1990년 1월 22일 전국노동조합협의회가 창립하면서 자본과 정권은 대기업 노조들이 민주노조로 전환하고 전노협에 가입하는 것을 결사코 막으려고 했다. 한진중공업 노동조합은 서울지하철 노동조합과 함께 전노협은 물론 1990년 12월에 결성된 대기업연대회에에 동시에 가입하였다. 안기부는 한진중공업 노동조합을 파괴하려는 끊임없이 공작을 해 왔다. 박창수 위원장이 구치소에 있을 때도 전노협과 대기업연대회의를 탈퇴하라며 온갖 회유, 협박을 자행하였다. 사망 전날에도 안기부 직원이 면회하며 탈퇴 공작을 계속하였다. 박창수 위원장은 “전노협이 나고 내가 전노협인데 어떻게 전노협을 탈퇴할 수 있단 말이냐”하며 끝까지 저항했다.

박창수는 부산기계공고를 졸업했다. 스물 두 살이던 1981년 8월 한진중공업의 전신인 대한조선공사에 배관공으로 입사하였다. 1986년 ‘도시락 거부투쟁’을 주도했다. 노동자들은 50여년 동안 식당도 없이 탈의실과 공장 모퉁이에서 머리카락과 휴지가 섞여 나오는 도시락을 먹었다. 노동자들이 “우리는 개밥을 먹을 수 없다”며 사흘 동안 도시락을 던져버렸다. 회사 쪽은 나흘 만에 식당을 건립하겠다고 약속했다. 노동자들이 승리했다.

한진중공업은 1987년 7.8.9 노동자대투쟁이 전개되던 7월 25일 25년의 어용노조 역사를 깨고 민주노조를 세웠다. 위원장을 직선제로 선출했다. 직선제로 선출된 위원장은 회사 측의 회유, 협박, 공작에 굴복해 조합원들의 요구를 제대로 실현하지 못했다. 위원장을 다시 뽑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1990년 7월 28일, 풍물패 ‘햇새벽’과 현장 활동가 조직 ‘백두회’ 회원이던 박창수가 노동조합 위원장에 출마하였다. 94%라는 압도적으로 지지로 당선되었다.

박창수 집행부는 1990년 9월부터 임기를 시작하였다. 1990년 1월 전노협이 건설된 해였다. 현장 조합원들의 의식을 높이기 위해 전체 조합원 교육을 시작하였다. 위원장이 직접 교육을 진행하였다. 노조사무실에 경찰과 기관원들의 출입을 막고, 노조간부들이 개별적으로 회사 관리자와 만나는 것도 금지시켰다. 해고자들에게는 생계비를 지급하였다. 훗날 2003년 크레인 위에서 고공농성을 벌이다 목숨을 끊은 김주익 위원장이 박창수 집행부의 문화체육부장이었고, 곽재규 열사는 열성조합원으로 현장에서 열심히 활동했다.

전노협이 창립되고 나서도 대기업 노동조합들이 전노협에 가입하지 않고 있을 때 한진중공업 노동조합은 전노협에 가입했다. 박창수 위원장은 부산노련(부산노동조합총연합) 부의장 겸 전노협 중앙위원으로 활동했다. 1990년 12월 발족한 대기업연대회의에도 적극 참가하여 공동대표로 활동하였다.

박창수 위원장

1991년 2월 10일 의정부로 넘어가는 곳에 있는 다락원 캠프에서 대기업연대회의 간부들이 수련회를 가졌다. 골리앗 크레인을 점거하고 파업에 돌입한 대우조선노조에 대한 지원방안을 논의하려는 모임이었다. 경찰이 들이닥쳐 수련회에 참석한 간부들을 제3자개입금지 위반으로 전원 연행하였다.

박창수 위원장은 2월 11일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4월 30일부터 양심수들과 함께 “노정권 퇴진,백골단 해체, 국가보안법 철폐, 노동운동 탄압중지‘를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벌였다. 5월 4일 운동시간에 이마에 상처를 입고 안양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안기부 요원이 몇 차례 전화를 하고 병원으로 왔다갔다.

1991년 5월 6일 새벽 5시 경 경기도 안양에 있는 안양병원 뒷마당에서 한진중공업 박창수 위원장이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언론은 투신자살로 보도했고, 검찰은 5월 10일 구치소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노조 활동에 회의가 들어서 투신 자살했다고 발표하였다. 죽기 하루 전에도 “죽어서 열사가 되는 것보다 살아서 싸워야 한다”던 그가 염증과 회의 때문에 아내와 아들 딸을 남겨 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 가장 먼저 달려가 시신을 확인한 박창수 열사의 아버지는 이렇게 의문의 죽음을 의심했다.

“딱 가니까 시신이 누워 있는데 상처가 하나도 없어요. 반창고가 그대로 붙어 있고, 피 난 데도 하나도 없어요. 그리고 링게루병이 반경 1m 정도에 소복이 쌓여 있는 거야. 쓰레빠도 이쪽 하나 저쪽 하나 있고. 나중에 알았지만 병원 높이가 18m야. 보통 옥상이면 1m 정도 턱이 있는데 그걸 신고 올라가서 떨어졌겠어요? 쓰레빠 그대로 있고 링게루 그대로 있고. 그때 내가 인갑이 보고 일회용 카메라 사와라 그래 사 온 거예요. 찍을라 하니 뺏고 박종환이가 자기가 다 찍어서 다 해드리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하면서 뺏드라고. 압수한 거지. 이미 죽은 거 갖다 버린 거야. 떨어졌으면 상처 피가 났을 텐데 하나 안 났으니. 그런 거 저런 거 없고 사진 하나도 안 주고, 그래 폐기처분 했다는 그런 말도 있어.”

박창수 위원장의 사망 소식을 듣고 노동자.학생들이 몰려와 경찰과 격렬하게 몸싸움을 벌였다. 저녁 7시경 퇴근한 노동자들과 학생들이 ’박창수 열사 구속 살인 규탄 및 노동운동탄압규탄대회‘를 열었다.

5월 7일 노태우 정권은 백골단과 전경 22개 중대를 안양병원에 투입했다. 최루탄을 퍼부으며 영안실 벽을 부수고 시신을 탈취해서 일방적으로 부검을 해 버렸다. ’제2의 살인‘을 자행한 것이다.

1991년 5월 7일 노태우정권의 백골단 안양병원 영안실 난입 (한겨레신문, 1991년 5월 8일자)
1991년 5월 7일 노태우정권의 백골단 안양병원 영안실 난입 (한겨레신문, 1991년 5월 8일자)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은 무기한 파업에 돌입하고 전체 조합원들이 상경 투쟁을 벌였다. 전노협은 한진중공업노동조합, 업종회의, 연대회의, 전국노운협, 전국노련(준)과 함께 대표자 회의를 열어 ’고 박창수 위원장 옥중살인규탄 및 노동운동탄압분쇄 전국노동자대책위원회(노대위)‘를 구성하였다. 5월 9일 총파업을 벌이기로 결정하였다.

5월 9일, 전국에서 30여 만명이 참여하여 ‘민자당해체와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대회’를 열었다. 전노협은 458개 노조 22만 명이 집회에 참여하였다. 총파업은 5월 18일로 이어졌다. 9만여 노동자들이 파업에 참가했다. 노동자들은 단위사업장의 문제가 아닌데도 파업을 벌이고 가두투쟁 나서서 ‘민중권력’과 ‘노동자권력’을 외쳤다. 6월 22일 장례대책위의 일부 대표자와 집행책임자들이 6월 29일 장례를 결정하였다. 60여일 만에 장례를 치루고 7월 1일 양산 솥발산 공원묘지에 시신을 묻었다. 박창수 열사의 묘비에 새긴 묘비명이다.

“재벌의 나라에 가난한 노동자로 태어나
인간답게 살기를 염원하던 사람
폭압의 세월에 목숨바쳐 전노협을 지키고
죽어서도 투쟁의 깃발 놓지 않은 노동자
살아오라 열사여!
천만 노동자의 가슴 속 노동해방의 불꽃으로!
1991년 7월 1일
전국노동조합 협의회
부산지역노동조합총연합
한진중공업 노동조합”

양산 솥발산 공원묘지 박창수 열사 묘비명
양산 솥발산 공원묘지 박창수 열사 묘비명

2000년 10월 17일 출범 2004년 6월 30일까지 활동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노태우 정권과 공안기관은 한진중공업 노조 간부들과 조합원들에게 “전노협만 탈퇴하면 박창수는 풀려날 수 있다”. “대기업연대회의에서 한진중공업 노조가 앞장서지 않도록 박창수를 설득하라”며 회유했던 것을 밝혀 냈다. 의문사위는 2004년 결정문에서 “국가안전기획부 요원의 개입 사실은 드러났으나, 국가정보원이 관련 자료 요청에 협조하지 않아 진상 규명 불능으로 결정하였다.”고 밝혔다. 2014년에 박창수는 민주화보상위원회(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에서 민주화운동 관련 사망자로 인정되었다. 2021년 9월 14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박창수 의문사 사건’을 다시 조사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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