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영화감독은 “관객에게 답을 주는 영화는 극장에서 끝나지만, 관객에게 질문을 주는 영화는 상영이 끝나야 시작된다”고 했답니다. 영화는 우리의 삶을 비추기도 하고 우리가 바라고 싶은 세계를 그리기도 합니다. 영화 속의 이야기들,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이야기들, 그리고 영화가 그리는 세계의 이야기들을 천천히 살펴보며 우리의 노동과, 세계를 이야기를 이송희일 감독의 <영화직설>에서 나누고자 합니다.
이송희일 감독은 1997년 <언제나 일요일같이>를 시작으로20여년 간 꾸준히 영화를 만들어 왔습니다. 대표작으로는 <후회하지 않아>, <탈주>, <야간비행> 등이 있습니다. 최근엔 SNS에서 활발히 기후와 생태, 자본주의를 뛰어넘는 상상력에 대한 이야기를 관객들과 나누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고 홍기선 감독의 35mm 데뷔작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 망망대해의 새우잡이 배에서 강제 노역하던 선원들의 사투를 다룬 영화다. 87년 민주화 체제로부터 낙오된 주변 군상들의 이야기. 우여곡절 끝에 92년 11월에 개봉했던 이 영화를, 극장이 아니라 대학교 강당에서 봤다. 당시 대학가 순회상영이 있었고, 몇몇 대학에선 수익금 일부를 백선본 선거운동에 보탰었다.

92년 백선본에 대한 기억은 선거운동하다 시장 상인들로부터 동태와 귤로 얻어 맞았던 장면과 저 영화가 가장 선연하다. 백기완 선생을 조문하고 장례식장 나오는 길에 마주친 구절 '혁명이 늪에 빠지면 예술이 앞장서나니'. 그 앞에서도 영화의 몇 장면이 떠올랐었다. 쉽게 발길을 떼지 못한 채 그 구절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의문 하나가 정수리에 나비처럼 내려앉았다.

선생이 남긴 수많은 글귀 중 저 문장이 유독 반짝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SNS에서 애도의 물결이 일 때도 사람들은 저 문장을 가장 많이 인용했다. 정말로 혁명이 늪에 빠지면 예술이 앞장서는 걸까? 그러고 보면, 선생은 평생에 걸쳐 예술을 삶의 전위에 배치하고 싶으셨던 것 같다.

천상, '이야기꾼'. 삶의 소소한 디테일, 잡초와 동물의 생김새, 농사꾼의 움직임으로부터 토속어를 길어올리고, 또 그것에 스토리를 가미하고 삶의 의미를 양각해 우리에게 펼쳐 보였다. 대중들에게 격문을 날릴 때도 그랬고, 선생의 수많은 저서가 그랬다. 수필, 시, 시나리오 등 매체를 가리지 않은 전방위 이야기꾼, 시대의 구라쟁이였다.

청년 시절엔 영화감독 지망생이었다. <단돈 만원>, <대륙>, <쾌진아 칭칭 나네> 같은 장편 시나리오를 집필하기도 했고, 아예 젊은 시절엔 16mm 카메라를 갖고 있었다고도 전해진다. 절구, 낫, 도리깨 등 4백 여 가지의 농기구 움직임을 형상화한 비서사 실험영화를 시도했었다고 한다. 만약 만들어졌다면 한국 독립영화사의 유의미한 궤적으로 남지 않았을까.

"엉뚱한 변신이라고 생각 마세요. 30년 반독재 투쟁에 시간이 없었을 뿐, 나도 청년시절부터 지금까지 영화를 꿈꿔온 사람입니다."

비록 감독의 꿈은 무위에 그쳤을지 몰라도 <파업전야> 등을 제작한 창작집단 '장산곶매'에서부터 선생을 따르던 영화인들에 이르기까지 그의 영향은 드넓고 웅숭깊었다. 모종의 영화미학을 구축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그저 예술은 삶과의 맹렬한 긴장 관계 속에서 빚어진다는 이치를 몸소 보여줬기 때문일 터다. 혁명이 늪에 빠질 때, 삶이 무의미의 진창에 빠져있을 때, 이야기꾼들이 나서 선창을 하며 조율된 의미들을 지친 이들에게 새처럼 날려보내야 한다는 그 조언 말이다.

그래서 그랬나. 2013년 11월, 노동자대회를 촬영하러 갔다가 프랭카드를 들고 앞장서고 있는 선생을 보고, 명치께가 저릿했다. 노구를 이끌고 여전히 맨앞에 있는 선생을 보자마자, 까맣게 잊고 살았던 영화에 대한 초심이 떠올랐다. 당시 난 지친 기색으로 <야간비행>이라는 극장편 영화를 촬영하고 있었다. 노동자대회 풍경을 담고 싶어 배우, 스텝들과 함께 행진에 참여했었다. 다급하게 촬영감독 등을 두드렸고, 마치 망각에 대한 알리바이인 양 선생의 모습을 영화 속에 담았다.

영화감독이 꿈이었던 거리의 백발 투사를, 한때 그의 선거운동원이었던 나의 영화 속에 담는 것 자체가 그렇게 하나의 울림이었다. 매운 각성이었다. 어쩌면, 장례식장 앞 저 글귀 앞에서 한참을 머뭇거렸던 것도, 나는, 우리는 과연 지금 어디쯤 있는지 곱씹듯 자문했기 때문이 아닐까. 영화를 배우기 위해 시골에서 <자본>, <악의 꽃> 두 권과 팬티만 달랑 집어들고 상경했던 나의 처음 그 이유에 대해. 삶의 결기를 파고드는 영화의 힘을 더 이상 믿지 않는 나의 속물성에 대해. 앞서기는 커녕 뒤켠에 퍼질러 앉아 사욕만 쫓는 우리 시대의 게으른 예술에 대해. 더 이상 꿈을 꾸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요컨대, 저 구절은 죽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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