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송희일의 영화직설
이송희일의 영화직설

지난 12월 10일, 짧은 동영상 한 편이 전세계에 타전됐다. 뉴욕주 버팔로의 한 스타벅스 매장의 노조 설립 찬반 투표 결과가 막 발표되고 있었다. 숨을 멈추고 있던 스타벅스 직원들이 결과가 발표되자 소리를 지르며 껑충껑충 뛰기 시작했다. 미국 스타벅스 50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노조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 동영상을 내 SNS 계정에 올리며 이렇게 첨언했다. “장담하건데, 이 장면은 나중에 영화로 만들어질 것이다.” 그만큼 명치께가 저릿했다. 그런데, 그 영상 속 장면과 똑닮은 영화가 이미 존재한다는 걸 금세 깨달았다. 노조 설립 투표 결과가 선언되자마자 노동자들이 환호성을 지르는 장면이 소름 돋도록 똑같다.

<노마 레이>(1979). 노동영화가 거론될 때 항상 먼저 손에 꼽히는 클래식 중 한 편이다. 미국 좌파 영화의 자존심 마틴 리트 감독이 전설적인 여성 노동운동가 크리스털 리 조던의 젊은 날을 스크린으로 옮긴 작품이다. 한국의 <파업전야>를 비롯해 세계의 수많은 노동영화에 적잖이 영향을 끼친 걸작.

1978년 여름, 섬유노조 소속 노동운동가 루벤이 소도시에 도착한다. 전 주민이 대대로 방직공장에서 일하는 가난한 도시. 이곳에서 두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던 노마 레이는 루벤을 만나면서 그 동안 자신들이 노조 없는 공장에서 얼마나 수탈당해왔는지 깨닫게 된다. 숱한 고난과 상처를 겪으면서도 고군분투하는 노마 레이의 진심에, 결국 노동자들은 노조 찬성표를 던진다.

‘노동자들이 연대를 위해 공장 기계를 멈추다’ 라는 관용적 수사의 원형을 제공한 게 바로 이 영화다. 노조를 조직하려다 해고당한 노마 레이가 기계 위에 올라가 ‘노동조합’이라고 적혀져 있는 팻말을 들자, 노동자들이 하나둘 기계를 멈추고 뜨거운 연대의 눈빛으로 교감하며 노동자로서의 존엄을 서로 확인하는 장면은 거듭 봐도 감동적이다. 수많은 영화들이 이 장면을 다양하게 오마주했다. 그렇다고 노조의 당위만을 품고 있는 프로파간다라고 생각하면 오해. 가부장제의 성차별과 인종차별을 노동 문제와 씨줄 날줄로 촘촘하게 교차하며 성찰하고 있는 이 작품은 지금의 웬만한 영화들보다 텍스트가 더 두껍고 풍성하다. 게다가 노조 찬성표가 더 많다는 선관위 전언에 노동자들이 함성을 지르는 이 영화 속 엔딩은 미국 스타벅스 노동자들의 영상을 그대로 복사해놓은 듯한 착시를 일으킬 정도로 현재적이다.

40년의 세월을 거슬러 두 개의 영상을 총알처럼 관통하는 키워드는 ‘노동조합’.

지난 8월 뉴욕주 버팔로 스타벅스 매장 3곳이 노조 신청을 했다. 미국 스타벅스 매장이 9천여개, 노동자는 23만명이 넘는다. 그 중에 노동조합이 단 한 군데도 없다. 노동자들을 ‘파트너’로 호명하며 노동조합 결성을 50년 동안 차단해왔던 스타벅스였다. 총력을 다해 노조 선거를 방해했다. 매장을 폐쇄하거나, 갑자기 직원수를 늘이거나, 각종 면담과 매장 운영 시간의 변경 등 5개월에 걸쳐 갖은 편법과 꼼수를 동원했다. 끝내는 이의제기도 통하지 않자 시급을 올리겠다고 선언했다. 덩달아 한국 스타벅스도 최저시급 상승을 발표했다. 돈은 뿌릴지언정, 노조만큼은 막아보겠다는 자본의 결사 항전이랄까.

그럼에도 버팔로 스타벅스 노동자들은 멈추지 않았다. DSA(미국 민주적 사회주의) 그룹뿐만 아니라 미국 하원의원 AOC를 비롯한 제도권 좌파들이 그들과 연대했다. 버니 샌더스가 상찬한 것처럼 ‘창의적이고 영감을 주는’ 방식으로 맹렬하게 노조 설립 운동을 벌였다. 3개 매장의 운명을 쥔 노동자는 기껏 100명이었지만, 단 한 곳이라도 노조가 결성되면, 23만명의 눈빛 속으로 퍼져 나갈지도 모를 불씨가 만들어지는 거였다.

반대 8명, 찬성 19명. 환호성과 함께 스타벅스 최초의 노조가 기어이 탄생했다. 버팔로 노조 트위터 계정은 그 감격을 한 마디로 압축해 표현했다. “역사가 만들어졌다!”. 그 소식을 듣고, 애리조나 매장과 보스턴의 매장 두 곳도 부리나케 노조 설립 투표를 신청했다. 스타벅스 사측이 가장 두려워하던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번 스타벅스 노조 탄생은 서비스와 플랫폼 산업 쪽에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칠 거라는 게 언론들의 대체적인 의견이다.

정부가 나서서 민주노총을 탄압하고 시민들마저도 노조를 혐오하고 있는 한국과 달리, 최근 미국에선 노조에 대한 인식이 가파르게 상승 중이다. 노조에 대한 긍정적 인식이 68%로 1965년 이후로 가장 높다. 노조 조직율도 상승 중이고, 올해에만 파업이 340건 이상이 벌어졌다. 심지어 조 바이든 정부도 노조 가입을 권유하고 있다. 판데믹을 경유하며 ‘노조’야말로 우리의 노동의 가치를 지키는 가장 중요한 백신이라는 걸 깨닫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누가 뭐라든, 지워진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대의하는 건 ‘노조’다. 마침내 당신들도 노조가 생겼다는 전언에 중력이 무색하도록 높이 솟구치며 기쁨의 소리를 지르는 노동자들이 많아질수록, 목소리 색깔이 다양할수록 그 사회는 훨씬 더 활력이 있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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