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0일 전태일 로드를 걷고 나서

전태일열사 53주기를 앞둔 지난 10일 민주노총 교육원이 기획한 ‘전태일로드’가 진행됐다. 차비를 털어 끼니를 굶던 평화시장 여성노동자들에게 풀빵을 사준 뒤 혼자 집까지 걸어갔던 전태일 열사의 퇴근길을 따라 걷는 행사다. 동대문 평화시장을 출발해 쌍문동 208번지(현 56번지)까지 이르는 약 12km의 길을 20여 명의 참가자들이 함께 걸었다. 당시 참가자가 보내온 참가기를 소개한다. [편집자주]

전태일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은?

대학 새내기 시절, 나에게 한 선배가 <전태일 평전>을 건넸다. 읽고 또 읽으며 뜨거워졌던 기억이 난다. 교과서에서 이름을 봤던, ‘분신’이라는 강렬한 장면으로 기억하던 전태일의 삶을 구석구석, 전태일과 조영래가 쓴 글을 한줄 한줄 읽었다.

나를 포함해서 많은 대학생이 전태일을 읽었다. 그리고 전태일이 바라던 ‘대학생 친구’가 되자고 마음먹었을 것이다. 정말 많은 사람이 전태일을 읽으며 운동을 시작했고, 전태일 정신을 공유하면서 동지가 됐다. 내가 선배가 됐을 때 나 또한 후배에게 같은 책을 선물했다.

선배가 나에게, 내가 후배에게 선물한 책, ‘전태일 평전’. 사진=박장준 제공
선배가 나에게, 내가 후배에게 선물한 책, ‘전태일 평전’. 사진=박장준 제공

노동조합 활동가로 일하다 보니 전태일을 자주 말한다. 아마도 거의 모든 노동조합의 조합원 교육 자료에는 전태일과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투쟁이 어떤 의미였는지, 그 투쟁이 우리 사회를 어떻게 바꿔왔는지 설명하는 대목이 있을 것이다. 신입 조합원 교육, 간부 교육, 11월 전국노동자대회 교육 자료에는 그의 삶과 투쟁이 소개돼 있다. 많은 조합원이 전태일을 읽으며 노조 활동을 시작하고, 매년 전태일을 복기한다. 그렇게 동지가 된다.

올해 4월 쌍문동에서 평화시장으로 걸었다. 11월에는 평화시장에서 쌍문동으로 갔다. 전태일의 길을 따라 걸었다. 4월에는 비를 맞으며 걸었고, 11월에는 바람이 셌다. 그러면서 나는 전태일 정신이란 과연 무엇인지, 전태일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봤다.

곳곳에 있는 노동 현장의 전태일로드

우리가 매년 11월 전국노동자대회에서 “열사 정신 계승하여”라는 문구로 시작하는 구호를 외치는 이유는 도대체 뭘까. 나는 그것이 바로 ‘동지와 투쟁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전태일이 바보회와 삼동회를 조직하고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투쟁을 이끌어냈듯, 내가 있는 곳에서 동지와 투쟁을 만드는 것이 바로 전태일 정신 아닐까 싶다.

2023년 11월 11일, 서대문역 사거리에서 열린 전국노동자대회. 수많은 전태일이 이룬 민주노조를 파괴하려는 윤석열 정권의 퇴행과 폭주를 규탄했다.  사진=노동과세계
2023년 11월 11일, 서대문역 사거리에서 열린 전국노동자대회. 수많은 전태일이 이룬 민주노조를 파괴하려는 윤석열 정권의 퇴행과 폭주를 규탄했다. 사진=노동과세계

이런 점에서 나는 전태일 정신에 가장 어울리는 이들은 이소선 그리고 전태일의 첫 동지인 평화시장의 민주노조 조합원들이라고 생각한다. 전태일을 계기로, 전태일을 딛고, 동지와 투쟁을 만들어온 사람들 말이다. 전태일만큼, 전태일보다 <어머니>와 <미싱 타는 여자들>이 중요한 이유다. 이들이 바로 전태일로드 12km의 주인공들이다. 이들은 더 많은 전태일과 투쟁을 조직했다.

어떤 측면에서 여전히 우리는 전태일처럼, 이소선처럼, 평화시장 노동자들처럼 산다. 1970년 평화시장의 자본가들과 군사정권은 전태일을 ‘깡패’라고 비난했다면 2023년 윤석열 정부는 민주노조를 ‘조폭’으로 부르며 탄압한다. 배달호, 김주익, 이용석… 우리는 계속 ‘열사 정신’을 외쳤고, 올해 일 년 내내 ‘양회동 열사 정신’과 ‘방영환 열사 정신’을 부르짖고 있다. 우리는 오늘도 탄압, 착취, 차별, 폭력, 전쟁, 위기에 맞서 동지와 투쟁을 조직하며 산다.

하지만 수많은 전태일들, 이소선들, 민주노조들이 투쟁하면서 세상은 참 많이 바뀌었다. 어느새 민주노총 조합원은 120만 명이 됐고, 민주노총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운동세력이 됐다.

전태일로드는 방영환 열사 투쟁 장소에, 명동, 서대문역 등 곳곳에 있다. 사진은 11월 2일 열린 방영환열사 투쟁 승리를 위한 공공운수노조 결의대회. 사진=공공운수노조
전태일로드는 방영환 열사 투쟁 장소에, 명동, 서대문역 등 곳곳에 있다. 사진은 11월 2일 열린 방영환열사 투쟁 승리를 위한 공공운수노조 결의대회. 사진=공공운수노조

2023년 전태일들은 수많은 경계와 차이를 뛰어넘어 너르고 깊게 연대하려고 애쓰고, 사회적 재난에 함께 맞서고, 성차별․폭력을 중단하기 위해 함께하고, 이주노동자 노동권을 구축하기 위해 투쟁하며, 기후위기에 긴급하게 대응하고,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공격을 규탄한다. 장애인 이동권-노동권에도 강하게 연대하고 주거권과 난민 문제에도 개입하려 한다. 이것이 전태일 정신이고, 이것을 잘 해내야 하는 것이 전태일 정신이다.

오늘 전태일로드는 곳곳에 있다. 방영환 열사 투쟁의 장소가 그곳이다. 서울 명동 세종호텔 앞에도, 서울 서대문 디엘이앤씨(옛 대림산업) 앞에도 전태일로드가 있다. 함께 걷자. 함께 싸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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