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0일 전태일 로드를 걷고 나서

전태일열사 53주기를 앞둔 지난 10일 민주노총 교육원이 기획한 ‘전태일로드’가 진행됐다. 차비를 털어 끼니를 굶던 평화시장 여성노동자들에게 풀빵을 사준 뒤 혼자 집까지 걸어갔던 전태일 열사의 퇴근길을 따라 걷는 행사다. 동대문 평화시장을 출발해 쌍문동 208번지(현 56번지)까지 이르는 약 12km의 길을 20여 명의 참가자들이 함께 걸었다. 당시 참가자가 보내온 참가기를 소개한다. [편집자주]

1970년 중학교 1학년, 시골 촌구석에서 전태일이 분신했다는 뉴스를 라디오로 들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때는 몰랐다. 1987년 남편과 결혼한 뒤 전태일 평전을 읽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전태일 로드를 신청했다. 오랜만에 전태일 평전을 다시 읽었다. 처음 읽는 것처럼 깜짝깜짝 놀라며 읽었다. 10일 ‘평화시장에서 쌍문동 208번지까지 퇴근길 12km’ 목걸이를 받고 이숙희 화섬식품노조 봉제인지회 회계감사님(1970년대 청계피복노조 교선부장)을 따라 옥상으로 올라갔다. 열사의 분신 후 장례 치르기를 거부하고 노동조건 개선 등 8개 안의 요구조건을 내 걸은 끝에 7평 사무실에 노동조합을 열었다고 말씀하셨다. 근무 시간 4시간 단축, 일요일 휴무, 시다 임금 직불제, 미싱사와 시다의 순차적 임금인상 등을 얻어 냈다. 1층으로 내려오니 열사가 분신한 현장에 불꽃 그림이 새겨진 동판을 보니 가슴이 아득해지는 것 같다.

평화시장 앞의 동판.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 준수하라 외치며 이곳에서 산화하다’라고 적었다. 사진=노동과세계
평화시장 앞의 동판.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 준수하라 외치며 이곳에서 산화하다’라고 적었다. 사진=노동과세계

여공들의 모교, 검정고시 수도학원

열사가 살아생전에 걸었던 그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숙희 감사님과 박준성 역사학연구소 연구원님의 설명을 들으니 열사의 숨결을 더 가까이 느끼며 걷는 느낌이다. 청계피복노조에서 (야간공부 교실) 중등 교실을 모집했을 때 200명이나 신청했다고 한다. 평화시장 3만 노동자 중 80%가 여성 노동자였다. 오빠나 남동생을 공부시키느라 본인은 공부를 못하는 현실이 얼마나 모순인가? 하루 14시간 15시간 일하고 늦게 퇴근해 한참 잠이 부족한데 꿀잠을 포기하고 새벽반에 공부하러 가는 것은 보통 독한 마음을 먹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수도학원은 최초의 검정고시학원으로 여공들의 모교였다. 열사의 향학열도 여공 못지않았다. 청옥고등공민학교에 다닌 1년을 가장 행복했던 기간이라고 회고할 정도로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던 전태일이었다. 통신강의록을 사서 공부하며 ‘하루에 두 시간씩 공부해 대학을 가자. 며칠이 남았다’라며 결심을 다졌다는 설명을 들었다.

하루에 누구나 먹는 밥 세 끼, 요즘은 너무 잘 먹어 살 뺀다고 야단들인데 60년대 그때의 전태일은 밥 먹듯이 밥을 굶었다. 그의 마지막 한 말이 “배고프다”였다. 그토록 위대하고 가슴 아픈 밥이다. 그런데 갈비탕에 밥이라니? 명절 대목을 앞두고 짐을 싸서 공장에 들어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졸음을 쫓느라 타이밍을 먹으며 쪽 가위를 들거나 미싱을 밟았다. 한눈에 봐도 오래된 노포로 보이는 진고개 식당에서 명절에 일하느라고 수고했다며 사준 갈비탕은 입에서 살살 녹도록 얼마나 맛났던가? 다른 식당보다 비싼 갈비탕을 사주는 마음씨 착한 사장님께 얼마나 고마워했던가? 뼈 빠지게 노동한 대가인 보너스를 안 주는 게 불법인 줄 알았다면 갈비탕이 그렇게 맛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알고 보니 사장님의 한 끼 식비는 200원인데 여공의 하루 일당은 50원이었다.

어느덧 고려대에 도착했다. 각자 준비한 간식을 꺼내 나눠 먹었다. 가래떡, 커피, 귤 등, 누군가 이것이 ‘오병이어’라고 말씀하셨다. 가래떡에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안내하시는 분이 사 온 김밥을 햇볕을 온몸에 받으며 같이 먹었다. 전태일 로드를 같이 걷는 동지들과 먹는 점심이 꿀맛이다.

통금시간에 걸린 전태일 열사가 머물렀던 곳으로 짐작되는 현 미아지구대 동화치안센터. 사진=노동과세계
통금시간에 걸린 전태일 열사가 머물렀던 곳으로 짐작되는 현 미아지구대 동화치안센터. 사진=노동과세계

통금 제도가 무의미했던 평화시장 어린 시다와 미싱사들 

평전에, 밤 1시가 됐는데 아들이 들어오지 않은 걸 보고 어머니가 걱정하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아들이 터덜터덜 집에 들어오는 장면이 있다. 이유를 묻자 “어린 여공들에게 풀빵을 사주고 차비가 없어 걸어오다가 통금에 걸려 파출소에서 자고 왔다”라고 한다. 때가 60년대 말이니 통금이 있었다. 역사 선생님께서 시대별 통금시간의 변천사를 알려 주셨다. 당시는 자정 12시에서 새벽 4까지가 통금이었다. 밤 10시가 되면 ‘청소년 여러분! 밤이 깊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기다리는 가정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라는 방송이 나왔다. 평화시장에서 일하는 중학생 나이의 여공들은 이 멘트에 해당되지 않는 청소년이었다. 미아역 근처 신일고등학교 부근에 조그만 파출소가 있었다. 평화시장에서 집까지 걸어가다가 12시 통금에 걸린 곳이 여기가 아닐까 추측한다고 했다. 통금에 걸려 자주 파출소를 드나들게 되니 순경들과 낯이 익어 이유를 물어보게 되었다. 사정을 알게 된 순경들이 범죄를 저지르거나 그럴 사람은 아니라고 보고 통금에 걸려도 무사통과할 수 있는 허가증 비슷한 것을 써주었다고 한다.

하루에 14시간 15시간 일하랴 힘들어하는 어린 시다와 미싱사들 먹으라고 풀빵을 사준 뒤 차비가 없어 평화시장에서 집까지 걸어가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떻게 하면 형제이고 마음의 고향인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노동환경을 개선할 수 있을까? 근로기준법을 잘 지키고 노동자들에게 월급을 지금의 3배를 주어도 망하지 않을 ‘모범업체’를 세우는 구상을 했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허기진 배를 부여안고 세 시간 정도 걸리는 깜깜한 밤길을 걸어갈 수 없었을 것 같다. 수유역 근처에 벤치가 둥그렇게 있는 곳에서 풀빵을 나누어 먹었다. 당장 먹기는 곶감이 달지만, 시다들이 평화시장에서 맞닥뜨리고 있는 팍팍한 현실을 풀빵을 사준다고 해결이 안 된다고 생각했을 전태일의 마음을 헤아려보았다.

전태일 로드의 끝. 전태일 열사 옛 집터 앞. 1970년대 쌍문동 208번지 주변 환경과 이소선 어머님과의 일화를 들었다. 사진=노동과세계
전태일 로드의 끝. 전태일 열사 옛 집터 앞. 1970년대 쌍문동 208번지 주변 환경과 이소선 어머님과의 일화를 들었다. 사진=노동과세계

무덤과 망부석을 묻은 아파트 단지

어느덧 걸은 지 다섯 시간이 넘었다. 전태일의 생가 쌍문동도 멀지 않았다. 혼자 걸으라고 했다면 진작에 전철 타고 집으로 도망갔을 것이다. 길을 같이 걸은 동지들이 있기에 걸을 수 있었다. 교선부장님은 69년에 평화시장에서 일하기 시작해 72년에 노조에 가입하셨다고 한다. 그 당시 쌍문동은 야산에 무덤, 망부석이 널려 있었다. 무허가집에서 살았는데 무허가라고 낮에 집을 허물고 가면 밤사이에 다시 지었다. 다시 지을 때마다 방을 키워갔다고 한다. 모임을 하려면 큰방이 있어야 한다면서. 교선부장님은 처음 이소선 어머님 댁에 왔을 때 밥을 깨작깨작 먹는다고 “밥 잘 먹고 노동운동 열심히 해야지”라며 야단을 맞았다.

어머님 집이 있어 밥걱정, 장소 걱정 안 하고 모임을 했다고 말씀하셨다. 열사의 분신 일이 돌아오면 어머님은 온몸이 마비되어 추도식에 모였던 동지들이 온몸을 주물러 드리고 밤새 떠들며 위로해 드렸다고 한다. 열사가 근로기준법 책을 읽을 때 어려운 한자가 수두룩해서 대학생 친구가 있었으면 바랐는데 죽고 나서야 대학생들의 연대가 물밀 듯했다. 그중 장기표 선생도 제일 먼저 병원으로 달려왔고 어머님께 이런저런 도움을 많이 주었다고 한다. 아파트에서도 아래위층에 살면서 아주 끈끈한 사이였다. 지금은 조금 다른 사람이 되었지만.  

인간해방의 불꽃 심지를 돋우다 

열사가 살았던 무허가집이 아파트로 변해서 올려보기만 했다. 일행은 열사 옛 집터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분신하고 어언 50년하고도 3년이 지났다.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자신을 불살랐지만, 여전히 노동자의 삶은 해고와 비정규직, 중대재해, 산업재해, 장시간 노동, 과로사, 가혹한 손배소에 허덕이고 있다. 열사가 지하에서 벌떡 일어나 다시 라이터를 찾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하루 행사로 산적한 문제가 바뀔 것이라고 보지 않지만, 인간해방에 대한 불꽃을 피운 열사의 뜻을 이어가는 끈을 놓지 않고 심지를 돋우는 그런 시간이 되었다는 것은 분명했다.

아파트 대단지로 바뀐 쌍문동 208번지(현 56번지). 삼익세라믹아파트 112동 위치가 전태일 열사가 살던 곳이다. 사진=노동과세계
아파트 대단지로 바뀐 쌍문동 208번지(현 56번지). 삼익세라믹아파트 112동 위치가 전태일 열사가 살던 곳이다. 사진=노동과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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