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통톡의 노동자 마음건강
통통톡의 노동자 마음건강

지난해 말 사회활동가와 노동자 심리치유 네트워크 통통톡에서는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정신건강이 투쟁할 수단조차 없는 노동자들 보다 낫다는 보고서를 냈다. 투쟁은 대부분 노동조합을 통해 이루어졌고, 그 노동조합은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조직이었다. 연구 논문이 아닌 보고서인지라 왜 그런지까지 분석하지는 않았지만 그 이유를 추측해 볼 수는 있다.

노동자들이 제일 힘들어했던 것은 현장의 실질적 상황 그 자체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현실을 바꾸지 못하고 견디기만 했던 시절이 가장 고통스러웠다고 말했다. 하루에 얼마나 일하고, 어떤 일정으로 패턴이 돌아가고, 그에 따라 월급을 얼마나 받는지는 일을 시작할 때부터 알고 있었다. 일이 많아질 때 따라오는 육체적인 피로나 월급이 적은 것에서 오는 불만은 이미 각오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통으로 다가오진 않았다고 했다. 그게 정말 힘들면 다른 일자리를 찾아 나설 수 있었고, 현실을 견디며 더 나은 일자리에 필요한 능력을 키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을 진짜 힘들게 하는 고통은 다른 곳에서 왔다. 현실을 바꿀 수 없다 것을 스스로 인정할 때와 그 밑에는 놓여있는 관계라는 괴물이 힘을 쓰는 과정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일을 하다 상처가 났는데 한참 지나서 알아차렸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생채기 정도의 소소한 것일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때에 따라서는 피딱지가 앉은 제법 큰 상처일 때가 있고, 발견되는 순간 갑자기 느껴지는 고통을 피할 방법은 없다. 이런 현상은 고통을 느끼는 뇌의 작동방식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우리에게 고통을 선사하는 뇌 부위는 배측전방대상피질(dACC)과 전방섬엽(anterior insula: AI)이란 곳이다. 최종적으로 이 부위에서 고통으로 판정을 하기 위해서는 뇌의 다른 부위에서 촉각, 시각, 관계 등에 대한 정보가 들어와야 한다. 예를 들어 같이 물건을 옮기다 넘어지면서 나는 팔이 살짝 긁혔지만 동료는 팔이 부러졌다고 해보자. 그 순간 내가 내 상처를 바로 알아챌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내 상처와 관련된 촉각 정보는 분명히 내 뇌로 들어갔겠지만 시각 정보는 동료의 부러진 팔에 집중되어 있고, 관계를 관장하는 뇌 부위는 동료를 걱정하느라 여념이 없다. 촉각 정보가 무시되고 있고 그 순간은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다. 대신 동료를 병원으로 보내고 나서, 뭔가 이상해서 몸을 살피다 상처를 발견하고 나서야 고통이 시작된다. 촉각이 시각과 통합이 되면서 고통으로 결론이 바뀐 것이다.

뇌는 관계의 파탄도 육체적인 손상과 같은 과정을 거쳐 고통으로 해석한다고 뇌과학자들은 말한다. 인간관계가 파탄났을 때도 팔이 부러지는 상처가 났을 때처럼 위에서 말한 뇌 부위에서 정보들을 종합하여 최종적으로 고통으로 해석할지 말지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인간관계에서의 갈등과 좌절로 인해 가슴이 찢어지고 심장이 부서지는 듯한 고통을 느낀다. 이것이 타이레놀 같은 진통제를 먹으면 이별의 고통이나 왕따로 인한 괴로움이 한층 완화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고통은 같은 곳에서 처리되기 때문이다. 다만 관계가 고통의 원인이 될 때는 실제 관계와 사실에 대한 해석이 육체적 고통에서 촉각이나 시각이 하는 역할을 한다. 휴게실이 생겼다는 사실은 동일하지만 휴게실을 만들어진 이유에 대한 해석은 다르면 감사하는 사람과 실망하는 사람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통통톡의 보고서에서 주목한 콜센터 노동자들 경우를 예를 들어보자. 콜센터 노동자들은 일을 통해 맺게 되는 고객과의 관계에서 한번, 직장 내부에서 겪게 되는 동료나 상사와의 관계에서 다시 한번 좌절감을 느낄 때가 있다고 진술하고 있다. 고객을 응대하고 있을 때는 이미 관계에 속을 지나고 있기 때문에 잘 느끼지 못하지만 응대가 끝나고 자신이 어떤 처지에 있었는지 자각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러면 뒤늦게 자신의 상처를 알아차린 사람처럼 고통이 폭풍처럼 밀려올 때가 있다고 한다. 실적에 목을 매는 직장 상사와 연결되는 관계에서는 자신이 선택한 회사에서 상담사들을 어떻게 취급하는지 최종적으로 확인이 되며 상처가 더 깊어진다고 한다. 이중의 고통에서 벗어나 집으로 돌아가 쉬지도 못하는 워킹맘은 육아의 죄책감까지 감당해야 한다.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노동조합은 노사관계에서 오는 사실과 해석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고통은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가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환경을 바꿀 가능성이 있는가 없는가에서 고통의 정도가 결정된다. 그리고 노동조합은 항상 가능성이 큰 쪽에 노동자들이 서 있을 수 있게 해준다. 부분적인 후퇴는 있을 수 있지만 선택이 있는 삶은 늘 우리에게 새로운 의미를 남기기에 결코 고통의 기억으로 후퇴하지 않게 한다. 사실을 바꿀 수 있도록 선택의 여지를 주고 그 선택에 의미를 부여하여 해석이 왜곡되는 것을 막하준다. 힘들지만 견딜 수 있게 되고 고통스럽지만 새로운 희망을 품을 수 있게 해준다.

쓰고 보니 뻔한 이야기를 했다 싶다. 그래도 남기고 싶었다. 우리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고 다만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을 뿐이라고 자꾸 이야기하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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