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 소개: 이 글을 쓰신 서선영님은 당시 평등노조 이주노동자지부 사무국장으로 농성에 참여했으며, 현재 충북대 사회학과에 재직하며 명동성당 미등록이주노동자 농성투쟁 아카이브 모임에서 활동중입니다.

20년 전 겨울, 그날들의 시작
내 인생에서 가장 긴 겨울이었다. 그 해 다이어리 속 빼곡한 일정은 하루, 한 달 그리고 그 겨울이 참 길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인생 곡선이란 걸 그린다면, 상승과 하강이 가파르게 이어지는 인생의 정점이 될 만한 그런 날들이었다. 2003년 겨울.  

겨울은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시작된다. 성당 주변을 커다랗게 휘감으며 부는 바람은 차가웠고, 언제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른다는 긴장감으로 삼엄한 분위기였다. 누군가는 커다란 배낭을 매고, 누군가는 여행 가방을 끌고 삼삼오오 모이고 있었다. 어느새 명동성당 들머리를 가득 메운 백여 명의 사람들.  

누가 한겨울에 집을 나와 길바닥에서 먹고 자는 걸 원하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그래야 했다. 더 이상 다른 선택지가 보이지 않는 절박함에 하나 둘 모였다. 강제추방의 공포 속에서 죽음에 이른 이주노동자 동료들의 소식이 매일 들려왔고, 오랜 삶터에서 계속 있을 수도 혹은 떠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오랫동안 침묵을 강요당했던 이주노동자들은 마지막으로 한번 해보자는 심정이었다. 

그렇게 이주노동자들의 슬픔과 분노와 결의로 ‘강제추방 저지와 미등록이주노동자 전면합법화를 위한 명동성당 농성투쟁’이 시작되었다. 2003년 11월 15일이었다.   

나 권리, 이야기 하고 싶어
농성이 어느 날 뚝딱 결정되고 시작된 것은 아니다. 고용허가제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된 2000년부터 2003년 농성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권리를 외치며 싸워온 수많은 이주노동자들, 그리고 이들과 함께 연대해온 선주민 노동자들이 있었기에 2003년 명동성당 이주노동자 농성은 가능했다. 그 중심에 네팔 출신 노동자 서머르 타파가 대표였던 평등노조 이주노동자지부가 있었다. 

2001년 5월 26일에 설립된 평등노조 이주노동자지부는 고용허가제 반대, 단속추방 중단, 미등록이주노동자 전면 합법화를 내걸고 이주노동자가 주체가 되는 투쟁, 그리고 국경을 넘는 노동자 단결과 연대를 실천하는 투쟁을 해왔다. 2002년 4월 7일 이주노동자 1000여 명이 결집한 첫 대중 집회는 한국정부의 단속과 강제추방에 항의하는 이주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모아냈다. 이주노동자들이 보여준 강력한 분노와 저항에 긴장한 정부는 집회에 참가한 노동자들을 전원 체포하여 추방한다는 지침을 내렸고, 이에 이주노동자지부는 ‘집회결사의 자유 쟁취와 추방 반대, 노동비자 쟁취’를 위한 농성투쟁을 77일간 지속하기도 했다.

평등노조 이주노동자지부가 힘차게 고용허가제 반대투쟁을 했음에도, 2003년 7월 31일 고용허가제 법안은 국회에서 통과되었고, 곧이어 미등록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집중 단속과 강제추방의 광풍이 불었다. 이주노동자들이 많은 공단지역은 불안과 공포로 술렁거렸다. 2001년부터 정부의 강제추방 정책에 맞서 투쟁해 온 이주노동자지부 조합원들은 그 불안의 끝에서 절망하는 동료들에게 더 이상 숨지 말고 함께 싸우자고 제안했다. 선전물을 들고 공단 곳곳을 다니며 사람들을 만나고, 서울경기지역 순회 집회를 하고, 출입국관리소 앞에서 단속에 항의하는 투쟁을 했다. 

명동성당에서 농성이 시작되기 3주 전, 2003년 10월 26일 전국 비정규직 노동자대회에 참가한 방글라데시 출신의 비두(평등노조 이주노동자지부 투쟁국장)가 상의가 탈의된 채 경찰에 끌려가면서도 ‘나 권리 있어, 나 권리 이야기 하고 싶어’라고 절규하는 장면은 여러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남아있다. 경기도 마석의 한 가구공단에서 노동자로 일하며 방글라데시 공동체와 평등노조 이주노동자지부 활동을 했던 비두의 절박한 외침은, 당시 많은 이주노동자들의 목소리였다. 비두가 그랬듯 잡혀가더라도 끝까지 권리를 외쳐보자는 마음으로 이주노동자지부 조합원들은 총회에서 농성을 결정했다.

명동성당 들머리에 모인 사람들: 막내 선주부터 빠떼장 아저씨까지
얼마나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농성에 참여할까, 평등노조 이주노동자지부 조합원 이외에는 예측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막상 농성일이 가까워지자 여기저기에서 농성에 참여하겠다는 사람들의 소식이 들렸다. 11월 14일 오후부터 네팔, 방글라데시, 필리핀, 인도네시아, 나이지리아 출신의 이주노동자들이 서울과 경기, 인천 지역에서 명동성당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농성장은 그야말로 다양한 국적, 민족, 젠더, 출신지역, 종교의 사람들이 함께 먹고, 자고, 투쟁하는 공간이 되었다. 거기에 산업재해를 당해 장애가 있는 사람, 체류기간이 4년도 되지 않은 사람부터 10년이 넘은 사람, 한국에서 만나 부부가 된 커플, 20대 초반부터 40대 후반까지 연령대도 다양했다. 

이렇게나 다른 사람들에게 공통점이 있었다면,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을 하며 한국 사회의 경제를 밑바닥에서부터 지탱해온 노동자라는 점이다. 그럼에도 한국 정부의 잘못된 정책으로 인해 미등록 이주자가 되어 불안정한 노동과 삶을 경험했고, 급기야 강제추방을 목전에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죽거나 혹은 떠나거나’ 와 같이 출구 없는 선택지 앞에서, 농성투쟁이라는 극단의 저항을 선택한 사람들, 이라는 점이다. 

사진 = 이상재
사진 = 이상재

길에서 보낸 380일, 그날들의 기억을 소환하는 이유
누구도 농성이 이렇게 오래갈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11월 15일에 시작된 농성은 길고도 길었던 그 겨울을 보내고도 끝나지 않았다. 380일이 지나서야 해단식을 했다. 그 사이 계절은 여러 번 바뀌었지만 마치 380일의 겨울을 보낸 것만 같다. 인생 곡선에서 상승과 하강을 수백 번은 오고갔을 그날들, 농성 참여자들에게 농성은 저항의 자유와 해방감, 동시에 고통과 아픔으로 남아있다. 

농성 투쟁을 했던 이주노동자들 중 상당수는 자신의 권리를 이야기했다는 이유로 강제추방되었다. 이주노동자들이 380일간 농성을 했지만 달라진 것 없는 현실을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으려 할 때, 세상은 변하지 않을까? 20년전 그날들의 기억을 다시 소환함으로써 우리는 다시 보고 다시 듣고자 한다. 20년전 농성은 참여한 이주노동자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미등록이주노동자들의 이토록 강렬했던 저항은 한국사회에 어떤 과제를 주었는지 되돌아보려 한다.

‘계속된다- 미등록 이주노동자 기록되다’ 

‘The Korean Dream’ 

‘죽거나 혹은 떠나거나-이주노동자 인터뷰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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