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합동단속을 목전에 둔 2003년 11월 15일, 명동성당에서 시작된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의 농성투쟁은 무려 380여 일간 이어졌다. 이주노동자 최장기 투쟁이었던 당시 농성에 대한 기억은 간단치 않다. 정부의 강력한 단속과 사회적 고립 속에 이어간 농성은 참가자들에게 고된 시간이었다. 물론 그 시간에서 건져 올린 우정과 기쁨도 소중한 기억일 것이다. 무엇보다 오랜 투쟁과 연대 속에서 누적된 주체 역량과 숙성된 문제의식이 이후 이주노조 건설, 대안적 미디어문화 운동, 귀환 농성단원의 사회적 활동과 초국적 연대를 비롯한 다채로운 이주노동인권활동으로 이어졌음을 잊어선 안 된다. 이런 의미에서 올해 20주년을 맞은 당시 농성투쟁을 몇 가지 주제어로 기억하면서 그 의미를 헤아려보고자 한다.

결기

처음에는 예상치 못했다. 농성투쟁이 한 해를 훌쩍 넘겨 380여 일간 이어지리라는 것을 말이다. 농성투쟁을 국내 이주노동운동사 최장기 투쟁으로 기록되게 만든 결정적 국면은 2004년 1월 18일 농성단원 총투표였다. 정부의 조건부 자진출국안에 대한 두 가지 방안을 선택지로 한 투표였다. 1안은 ‘출국 후 고용허가제로 들어 올 수 있다는 보장이 확실하다면 우리 입장을 정해서 협상에 임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2안은 ‘출국이 전제된 안에 반대하고 한국에서 합법화를 이룰 수 있도록 법 개정 투쟁을 한다’는 것이었다. 투표에 참여한 74명 가운데 59명이 두 번째 안을 택했다.

2004년 1월 18일, 농성 참가 이주노동자들은 총투표에서 정부의 조건부 자진출국안에 반대하고 투쟁을 이어가기로 했다. 사진=다큐 영화 '계속된다 – 미등록 이주 노동자 기록되다' (주현숙 감독, 2004)
2004년 1월 18일, 농성 참가 이주노동자들은 총투표에서 정부의 조건부 자진출국안에 반대하고 투쟁을 이어가기로 했다. 사진=다큐 영화 '계속된다 – 미등록 이주 노동자 기록되다' (주현숙 감독, 2004)

59는 농성단의 결기를 보여주기에 충분한 숫자였다. 정부 타협안의 부당성을 문제시한 ‘시민 불복종’이었다. 가장 취약한 위치에 놓인 자들이 보여준 가장 강렬한 의지의 표출이었다. 결기의 원천은 농성투쟁 현장에서의 연대와 교육, 그리고 그 바탕에서 형성된 권리 주체성과 노동자 의식에서 찾을 수 있다. 그렇지만 그 뿌리는 깊고 넓었다. 그들의 결기는 십여 년간 이어져 온 이주노동운동의 연장에서 뿜어져 나온 것이기도 했다. 1994년 미등록 이주노동자 경실련 농성, 1995년 산업연수생 명동성당 농성, 2000년 10월 출범한 이노투본(이주노동자 노동권 완전 쟁취와 이주·취업의 자유 실현을 위한 투쟁본부)과 그것의 재편으로 2001년 5월 결성된 평등노조 이주노동자지부의 투쟁으로 이어져 온 이주노동인권운동의 흐름이 있었다. 여기에 노동사회단체와 활동가 및 대학생의 지지와 연대가 더해져 이주노동자 최장기 농성투쟁의 사회적 터전이 닦였다.

국가폭력과 진혼

아래 유인물은 2003년 11월 17일 시작된 정부의 합동단속을 전후로 돌아가신 이주노동자들의 명단을 담고 있다. 연이은 사망 소식에 명동성당 농성투쟁단은 슬픔과 고통 속에서도 분노와 결기의 수위를 높여 갔다. 고인의 죽음은 각기 특수한 상황과 맥락을 갖기에 그 의미를 함부로 재단해선 안 된다. 그렇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주노동자 사망 사건이 특정 시기 연이어 발생했다면 그것은 어떤 구조적인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특히 정부 합동단속이 본격화된 시점을 전후로 사망 사건들이 발생한 사실은 이들의 죽음이 ‘국가폭력’ 측면에서 살펴봐야 할 사건들임을 일깨워준다. 죽음의 배경이 된 국가폭력에 대한 반추는 힘든 세상에서 자신을 비워낸 이들에 대한 못 다한 ‘진혼(鎭魂)’이기도 하다.

사진=명동성당 이주노동자 농성투쟁 아카이브 모임
사진=명동성당 이주노동자 농성투쟁 아카이브 모임

이런 맥락에서 강조하고 싶은 한 가지는 ‘정책 타당성’이다. 이주노동자의 기본적 권리 및 처우 관련 정책을 정부가 입안, 시행할 때 반드시 그것의 타당성을 따져봐야 한다는 뜻이다. 특히 비정규 체류 이주민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행정의 경우 신체적, 정신적 폭력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단속 공무원들에게도 예외가 아니다)는 점에서 더더욱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이제라도 단속추방 등 이민통제 조치를 시행할 때에는 사전에 그것이 어떤 ‘인간의 고통’을 초래할 수 있는지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무리한 요구가 아니다. 자유주의 헌정질서를 수호하는 정부라면 응당 지켜야 할 ‘절제된 통치(limited government)’에 대한 정당한 요구다.

존재와 법

존재와 법은 긴장 관계에 있다. 이민정책도 예외가 아니다. 이주민의 실제 삶과 이주 관련 법제(특히 체류자격제도) 사이의 괴리를 말하는 것이다. 명동성당 농성투쟁은 자신들의 ‘존재 선언’을 통해 이 간극을 문제시하면서 출입국체류관리행정을 이민윤리 시각에서 성찰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준 ‘계몽운동’이었다.

그렇지만 법무부를 필두로 한 유관 부처와 농성투쟁단의 인식 차는 컸다. 당국은 ‘합법/불법’ 도식으로 존재를 규정했다. ‘합법’과 ‘불법’은 분절된 법적 영역이고, ‘불법’은 처벌 대상이 되는 위법 외에 달리 해석될 여지가 없었다. 한나 아렌트(Hanna Arendt)의 표현을 빌리면 ‘불법’은 ‘무사고(thoughtlessness)’의 대상이나 마찬가지였다. 정부가 사면이나 체류 안정화(통상 ‘합법화’라 불린다)에는 한참 못 미친 출국유예와 단속추방 조치를 인습적인 방식으로 택했던 까닭이기도 하다. 아래 고용허가제 제정 법률 부칙 제2조는 그러한 국가 인식의 한계를 명징하게 보여준다. 반면 농성단의 눈에 ‘합법’과 ‘불법’은 분절적이지 않았다. “불법! 불법! 하지 마라! 하지 마라!”고 외쳤던 그들의 눈에 ‘불법’은 ‘합법’과 잇닿아 있었다. ‘합법’에 대한 정부 규정이 ‘불법’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2003년 8월 16일 제정된 ‘외국인근로자의 고용 등에 관한 법률’ 부칙 제2조. 출처=법제처 국가법령정보센터 홈페이지
2003년 8월 16일 제정된 ‘외국인근로자의 고용 등에 관한 법률’ 부칙 제2조. 출처=법제처 국가법령정보센터 홈페이지

이러한 인식의 차는 오늘날도 크게 변함이 없다. 그렇지만 당시 농성투쟁은 ‘합법/불법’ 이분(합법성 관점)에 함몰되지 않고 ‘합법-불법’ 연계(정당성 관점)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미등록 상태에 있다고 하더라도 합당한 조건을 전제로 ‘사회적 성원’으로서 ‘머무를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는 인식에 불을 지핀 역사적 사건이다. 관련해 한 장면이 떠오른다. 2003년 10월 26일 전국비정규직노동자대회에 참가한 평등노조 이주지부 간부 비두 씨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연행되었다. ‘나! 권리 있어!’ 그때 그의 이 짧은 외침에 담긴 메시지는 참으로 무거웠다. 그날 그의 목소리를 새날과 잇는다면 그것은 ‘사회적 성원권’과 ‘체류권’에 대한 정당한 요구로 읽힐 수 있다.

그날‘들’

그날‘들’. 380여 일간의 명동성당 농성투쟁을 기억하는 마지막 주제어다. 세 가지 의미를 함축한다. 우선 농성투쟁에 힘을 모았던 이주노동자, 연대 활동가, 시민들은 당시를 다양한 방식으로 기억할 것이다. 각자도 당시를 일관되게 기억하기보다는 변화하는 현재 위치에서 농성투쟁으로부터 새로운 의미를 캐낼 것이다. 그렇기에 그날에 대한 각자의 기억이 이뤄지고 모이고 소통된다면 농성투쟁의 다채로운 모습과 풍성한 의미 및 현재적 함의가 떠오를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당시 기억을 힘들어하는 분들도 조금씩 마음을 열고 자신의 생애사에서 그날의 의미와 현재 삶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2023년 11월 26일, ‘담대한 이주-노동자의 꿈’이라는 제목으로 열린 집담회에서 명동성당 농성투쟁에 참가한 이주노동자들과 연대 활동가들은 당시의 기억을 함께 나누었다. 사진=명동성당 이주농성투쟁 기록모임
2023년 11월 26일, ‘담대한 이주-노동자의 꿈’이라는 제목으로 열린 집담회에서 명동성당 농성투쟁에 참가한 이주노동자들과 연대 활동가들은 당시의 기억을 함께 나누었다. 사진=명동성당 이주농성투쟁 기록모임

다음으로, 당시 이주노동자들의 농성투쟁은 명동에만 있지 않았다. 그들의 외침은 성공회대성당, 기독교연합회관, 기독교백주년기념관에서도 울렸다. 서울뿐만 아니었다. 경남, 대구, 안산, 마석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도 농성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명동성당 농성투쟁에 대한 기억 작업은 전국 곳곳에서 전개되었던 또 다른 이주노동자 투쟁의 그날‘들’을 함께 기억하고 상호 소통되게 하는 마중물이 될 수 있다.

그날‘들’의 마지막 의미다. 명동성당 농성투쟁에 대한 역사적 이해와 평가는 국내 이주노동인권운동사를 구성해 온 크고 작은 투쟁의 지속과 단절 및 변모와 같은 역동과 분리될 수 없다. 수많은 투쟁의 그날‘들’을 아우르는 이주노동인권운동사의 맥을 짚고 그 안에서 농성투쟁을 기억한다면 성찰적이고 건설적인 방식의 기억 작업이 이뤄질 수 있다. 이것은 명동성당 농성투쟁(2003-2004)에 대한 기억 작업이 낭만화되거나 특권화될 수 없는 까닭이기도 하다. 그것은 책무에 가깝다. 이주노동인권을 위한 투쟁의 그날들을 새날과 잇고 그 안에서 그날들의 현재적 의미와 가치를 찾는 작업을 독려하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쓰신 한준성 님은 명동성당 미등록이주노동자 농성투쟁 아카이브 모임에 참여하고 있으며 강릉원주대학교 다문화학과에 재직하고 있습니다.

*11월 15일부터 12월 17일까지 명동성당 이주노동자 농성투쟁 20주년 기념 전시회가 서울 강북노동자복지관에서 열렸습니다. 전시가 끝났지만 VR을 통해 전시를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전시와 20주년 리유니온 행사 개최를 위해 소셜펀치 모금도 하고 있으니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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