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2004 명동성당 미등록이주노동자 농성투쟁의 장면들

2003년 겨울 명동성당 들머리. 그곳은 해방구였다. 강제추방의 공포에 떠밀려 명동성당에 왔으나 움츠리지 않았다. 웃고, 춤추고, 노래를 부르며 주먹을 치켜올렸다. 주먹을 치켜올린 매 순간은 내가 인간이라는, 노동자라는 자각의 순간이었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은 움츠려 있지 않았다. 웃고, 춤추고, 노래를 부르며 주먹을 치켜올렸다. (2003.12.03.) ⓒ이상재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은 움츠려 있지 않았다. 웃고, 춤추고, 노래를 부르며 주먹을 치켜올렸다. (2003.12.03.) ⓒ이상재

농성의 시작
2003년 7월 31일 ‘외국인근로자의고용등에 관한 법률안’이 국회에서 통과되면서 미등록 이주노동자들 사이에 이번에 있을 강제추방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강도로 진행될 것이라는 불안감이 팽배했다. 정부도 합동단속반을 투입해 강력하게 단속하겠다고 했다. 단속 초기 이주노동자들 사이에서는 ‘제조업’은 단속하지 않을 것이라는 루머도 돌았지만, 슈퍼마켓과 식당에서 물건을 사던 중에, 밥을 먹던 중에, 그리고 공장에서 일하는 중에도 출입국 단속반이 들이닥쳤다. 전에 없던 위기감에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은 여권을 들고 배낭을 메고 명동성당에 몰려들었다.

달리는 지하철에 뛰어들었던 다라카, 공장에서 2미터 높이의 호이스트에 목을 맨 비꾸, 검은 바다에 몸을 던진 안드레이, 그리고 ‘불법체류자’라며 고용을 거부한 공장에서 목을 맨 부르혼. 11월 17일부터 시작된 단속추방 때문에 적어도 그해 겨울 적어도 미등록 이주노동자 17명이 자살을 선택하거나 심장마비로 삶을 마감했다.

12월에 들어서면서 쉼터와 농성장을 찾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은 점점 늘어나 명동성당 89명, 대한성공회성당 70여 명, 한국기독교협의회 300여 명(중국 동포), 기독교백주년기념관 140여 명 등 서울에서만 600여 명이 합류했다. 그 밖에도 경남 지역 300여 명, 대구 지역 100여 명, 마석 지역에 80여 명까지, 농성에 참여한 이주노동자들은 전국적으로 1,000여 명에 달했다.

“Don’t Hide! Fight for your right!(숨지말고 우리의 권리를 위해 싸우자)”라며 12월 13일 있을 대학로 집회 참여를 호소하는 유인물. (2003.12.) ⓒ아카이브 모임
“Don’t Hide! Fight for your right!(숨지말고 우리의 권리를 위해 싸우자)”라며 12월 13일 있을 대학로 집회 참여를 호소하는 유인물. (2003.12.) ⓒ아카이브 모임
12월 18일 세계이주노동자의 날 기념 및 강제추방으로 죽어간 이주노동자 추모집회가 서울 종로타워 앞에서 진행됐다. 이날 집회에는 명동성당 농성단뿐만 아니라, 대한성공회성당, 마석, 안산에서 농성을 하고 있던 이주노동자가 함께했다.(2003.12.18.) ⓒ이상재
12월 18일 세계이주노동자의 날 기념 및 강제추방으로 죽어간 이주노동자 추모집회가 서울 종로타워 앞에서 진행됐다. 이날 집회에는 명동성당 농성단뿐만 아니라, 대한성공회성당, 마석, 안산에서 농성을 하고 있던 이주노동자가 함께했다.(2003.12.18.) ⓒ이상재

홀로 남은 명동성당 농성단 : “여기 이곳에서 전면합법화 쟁취!”
보수 언론들은 세계 어디를 보아도 ‘불법체류자가’ 집단행동을 하는 예는 없다고 비난했다. 강력한 미등록 이주노동자 단속, 자진 출국 유도에도 큰 효과를 보지 못한 법무부는 2004년 1월 17일 자진해서 출국할 경우 재입국을 허용하겠다며 협상안을 제시했다. 다른 농성단은 모두 정부의 협상안을 받아들이고 해산했다.

그러나 명동성당 미등록 이주노동자 농성단은 18일 총회를 열고 정부안을 거부하겠다고 결정했다. 380일로 향하는 중대한 결정이었다. 농성단은 자진출국이 아니라 ‘여기 이곳에서 전면합법화’를 요구했다. 그러자 한국 정부는 ‘불법 체류자 집단행동은 정부에 대한 도전’이라며 처벌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2월 15일 농성단 단장 서머르 타파가 혜화동에서 자진출국 거부 서명운동을 받던 중 단속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래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농성투쟁을 시작한 이주노동자들은 ‘노동자’. ‘노동조합’, ‘투쟁’, ‘연대’라는 한국말을 말로, 글로 그리고 몸으로 배웠다. 보호소 안팎에서 단식투쟁을 했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은 움츠려 있지 않았다. 웃고, 춤추고, 노래를 부르며 주먹을 치켜올렸다. (2003.11.29.) ⓒ이상재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은 움츠려 있지 않았다. 웃고, 춤추고, 노래를 부르며 주먹을 치켜올렸다. (2003.11.29.) ⓒ이상재
이른 아침 농성에 참여한 이주노동자가 신문을 읽고 있다. (2003.12.02.) ⓒ이상재
이른 아침 농성에 참여한 이주노동자가 신문을 읽고 있다. (2003.12.02.) ⓒ이상재
농성단 식사 시간. (2003.12.03.) 네팔, 방글라데시,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의 입맛을 모두 맞출 수 없는 식사로 인해 매일 먹는 식사에 불만이 생기기도 했다. ⓒ이상재
농성단 식사 시간. (2003.12.03.) 네팔, 방글라데시,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의 입맛을 모두 맞출 수 없는 식사로 인해 매일 먹는 식사에 불만이 생기기도 했다. ⓒ이상재
투쟁문화제 공연 연습을 하는 이주노동자들. (2003.12.04.) ⓒ이상재
투쟁문화제 공연 연습을 하는 이주노동자들. (2003.12.04.) ⓒ이상재
이주노동자 90여 명이 명동성당 들머리에는 네 동의 텐트가 세워졌다. 90여 명이 여기서 380일간 농성투쟁을 이어갔다. (2003.12.11.) ⓒ이상재
이주노동자 90여 명이 명동성당 들머리에는 네 동의 텐트가 세워졌다. 90여 명이 여기서 380일간 농성투쟁을 이어갔다. (2003.12.11.) ⓒ이상재

12월 20일 다시 만날 우리, 20년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2004년 봄이 지나고, 여름. 달라지는 것 없이 무력감에 지쳐 농성장을 떠나는 사람이 늘기 시작했다. 가을이 지나고 다시 겨울. 2004년 11월 28일 380일간의 농성투쟁이 끝이 났다.

2003년부터 2004년까지 있었던 명동성당 농성투쟁으로부터 20년이 흘렀다. 그리고 이제 12 월 20일이면 네팔 카트만두에서 20년 전 명동성당에서 함께 싸우던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다시 만난다. 20대, 30대 가장 빛나던 청춘의 명동성당 들머리가 이들에게 그저 아픈 기억만은 아니었기를. 그리고 그 시간이 이들의 생애에 어떤 의미인지 묻고 기록하고 싶다.

몸자보를 하고 지하철 시민들에게 유인물을 나눠주는 농성단원들(2003.12.27.) ⓒ이상재
몸자보를 하고 지하철 시민들에게 유인물을 나눠주는 농성단원들(2003.12.27.) ⓒ이상재
수원역에서 단속추방반대 집회를 열고 있는 농성단(2004.2.1.). 홀로 남은 명동성당 농성단. 안산, 수원, 의정부 지역을 돌며 집회를 열고 “Don’t hide! Let’s fight together!(숨지 말고 함께 싸우자)”를 외치며 이주노동자들에게 투쟁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이상재
수원역에서 단속추방반대 집회를 열고 있는 농성단(2004.2.1.). 홀로 남은 명동성당 농성단. 안산, 수원, 의정부 지역을 돌며 집회를 열고 “Don’t hide! Let’s fight together!(숨지 말고 함께 싸우자)”를 외치며 이주노동자들에게 투쟁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이상재
서울출입국관리소 앞에서 보호소 내 단식투쟁 돌입 선포식 및 항의 집회가 열렸다. (2004.02.17.) 당시 파업을 진행 중이었던 외환카드 노동조합이 함께 했다. ‘사장님’,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밖에 없었던 이주노동자들에게 이제는 연대하는 ‘동지’가 생겼다. 새로운 관계의 시작이었다. ⓒ이상재
서울출입국관리소 앞에서 보호소 내 단식투쟁 돌입 선포식 및 항의 집회가 열렸다. (2004.02.17.) 당시 파업을 진행 중이었던 외환카드 노동조합이 함께 했다. ‘사장님’,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밖에 없었던 이주노동자들에게 이제는 연대하는 ‘동지’가 생겼다. 새로운 관계의 시작이었다. ⓒ이상재
2004.2.15. 서머르 타파 농성단 단장이 혜화동에서 자진출국 거부 서명을 받던 중 연행되어 여수보호소로 이송됐다. 보호소 안에서 ‘연행 이주노동자 석방’과 ‘강제추방 중단’, ‘미등록 이주노동자 전면 합법화’를 요구하며 17일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2004.2.19.) ⓒ이상재
2004.2.15. 서머르 타파 농성단 단장이 혜화동에서 자진출국 거부 서명을 받던 중 연행되어 여수보호소로 이송됐다. 보호소 안에서 ‘연행 이주노동자 석방’과 ‘강제추방 중단’, ‘미등록 이주노동자 전면 합법화’를 요구하며 17일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2004.2.19.) ⓒ이상재
농성단 새해맞이 속초 여행 (2004.1.1.~2.) ⓒ이상재
농성단 새해맞이 속초 여행 (2004.1.1.~2.) ⓒ이상재
농성단 새해맞이 속초 여행 (2004.1.1.~2.) ⓒ이상재
농성단 새해맞이 속초 여행 (2004.1.1.~2.) ⓒ이상재

글·변정필/사진·이상재 외

필자소개 : 이 글을 쓰신 변정필 님은 농성 당시 교육선전국장으로 활동했고, 명동성당 미등록이주노동자 농성투쟁 아카이브 모임에서 활동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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