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옵티칼하이테크에서 일한 이열균 조합원의 삶을 돌아보다

2022년 10월 4일, 구미의 한 공장에 불이 났다. 150여 명이 일하던 공장에 난 화재로 회사는 화재보험금 1,300억을 받았다. 안 그래도 일본 기업을 구미에 유치하기 위해 20년간 1만2천 평 땅을 무료로 임대하던 구미시의 제도로 혜택을 받고 들어온 일본 기업이었다. Nitto의 계열사인 한국옵티칼하이테크다. 불이 난 지 한 달 만에 회사는 화재보상금만 받고 공장을 청산하겠다고 했다. 노동자들은 문자로 통보받았다. 약 130명의 노동자는 희망퇴직하고 떠났지만 13명의 노동자는 남았다. 공장을 지키며 '고용안정 쟁취' 외치고 있다.
집회 한번 안 해봤다는 노동조합, 노동조합 사무실엔 명절 선물 받으러만 와봤다는 조합원들이 약 10개월간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처음엔 쭈뼛대고 창피해했으나 지금은 사측의 강도 높은 압박을 견디며 싸우고 있다. 이들을 한 명씩 만나서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했다. [편집자주]

겨울에 선전전을 하고 있는 이열균 문체부장.
겨울에 선전전을 하고 있는 이열균 문체부장.

한국옵티칼하이테크 노동조합에 다소 특별한 구성원이 있다면, 문체부장이 있다는 점이다. 이열균 문체부장은 문화제에서 연대공연을 해준 이에게 답가로 노래를 자주 부르곤 하는데, 워낙 센스가 넘쳐서 다소 지칠 수 있는 장기 투쟁 현장에서 분위기를 바꾸는 역할을 한다. 사람 사이에 관계를 중시하고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하는 이열균 문체부장이 어째서 공장 점거를 이어가며 투쟁을 하고 있는지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했다.

1988년, 열균 씨는 구미에서 태어났다. 열균 씨는 쭉 구미에서 살았다. 타지역에 있는 대학교를 다니던 것만 제외하고 항상 구미에서 살았다. 삼남매 중 막내인 열균 씨는 어릴 때부터 방송인이 꿈이었다. 배우나 가수처럼 특정한 직업을 생각한 게 아니라 그냥 방송인이 하고 싶었다. 원래 노래를 잘해서, 대학 입시 실용음악과를 합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부모님의 ‘어떻게 노래해서 먹고 살겠냐’는 말에 가수를 포기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방송계에만 있을 수 있으면 딱히 열균씨에겐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대학 엔터테인먼트학과를 다니며 연예인 매니저를 준비하기도 했다. 학기 중엔 공부를 하며 준비했고 방학엔 여러 현장에서 소품팀도 하고 총무팀 일도 하고 잔심부름도 하면서 일을 배웠다.

열균 씨가 26살이 되었을 무렵, 부모님이 ‘너 그러지 말고 구미로 내려와서 자격증 따서 근처에서 일 다니면 좋겠다’고 했다. 열균 씨는 부모님이 뜻대로 학교를 그만두고 구미로 돌아왔다. 열균 씨는 부모님의 이야기를 잘 들었는데, 열균 씨의 누나들은 비교적 ‘좋은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부모님의 ‘자식 걱정’은 이제 열균 씨만 남은 상황이었다. 그 상황에서 열균 씨는 부모님의 이야기를 거절하기 어려웠다.

2013년 9월 23일, 열균 씨가 한국옵티칼하이테크에 입사했다. 입사하던 날 조원들 앞에서 자기소개를 했다. “새로 일하게 된 이열균입니다. 일 잘할 자신 있습니다. 뭐든지 시켜주시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패기 넘쳤다. 열균 씨의 첫 공정은 ‘단면 가공’이었다. 핸드폰에 들어가는 편광필름을 자리에 맞게 수백 장 쌓으면, 기계가 모서리를 둥글게 잘랐다. 그럼 필름에 붙은 이물질을 살살 제거하고 다음 공정으로 넘기는 일이었다. 처음엔 일이 서툴러서 수만 장 불량을 내기도 했다. 지인 결혼식에 갔던 열균 씨에게 조장이 전화를 해서 ‘너 일부러 이러는 거야? 왜 이래?’라며 위압적으로 말하기도 했다. 열균 씨는 그 전화에 “제가 모서리 공포증이 있어서 다 잘라버렸어요”라며 너스레도 떨고 농담도 하면서 넘겼다.

구미 시내에서 선전전 중인 이열균 문체부장
구미 시내에서 선전전 중인 이열균 문체부장

 

7년 정도 일했을 무렵, LG가 핸드폰 장사를 접기로 하면서 LG에 편광필름을 납품하던 한국옵티칼하이테크의 물량이 대폭 줄었다. 더 생산할 필요가 없어지면서 열균씨도 TV 필름 공정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게 2019년 1차 희망퇴직과 2020년 2차 희망퇴직의 큰 이유가 되었다. 열균 씨는 두 번 모두 퇴직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나가서 뭘 해야 하나?’라는 막막함이 함께 들었다. 그래서 일부러 회사가 희망퇴직을 받는 마지막 날보다 하루 지나서 퇴직 서류를 제출했다. 회사가 ‘늦었지만 받아줄게’하면 퇴직하는 거였고 ‘하루 지나서 냈으니 처리 안 됩니다’라고 하면 계속 다니는 거였다. 선택을 내리기 어려우니 회사에게 선택을 넘겼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회사는 두 번 모두 하루 지난 퇴직서를 반려했고 열균 씨는 쭉 일했다. 물론 일은 힘들어졌다. 700명쯤 되던 노동자가 50명대로 줄었으니, 당연한 거였다. 이젠 한 명이 여러 공정을 할 줄 알아야 했다. 한 공정을 하고 있다가도 다른 공정에서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하면 바로 옮겨가야 했다. 어제와 오늘 하는 일이 같을지 다를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회사는 이를 ‘멀티화’라고 부르며, 고과에 반영한다고 했다. 한 공정마다 매우 잘하면 4점, 보통이면 3점, 잘할 줄 모르면 2점, 하나도 모르면 1점을 준다고 했다. 얼마나 일이 많았는지, 원래 노동자들이 입고 일하던 방진복을 기존엔 두 달에 한 번씩 세탁하면 충분했는데 이젠 일주일에 한 번씩은 세탁해야 했다.

열균 씨는 시간이 지나면서 ‘리더’ 역할을 맡았는데, 조장과 함께 조원들을 보살피고 가르치는 직책이었다. 대부분의 조장과 리더는 조원들이 실수했을 때, 다시 실수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호되게 혼냈다. 그러나 열균 씨는 조금 달랐다. 원래도 참을 수 있는 역치가 높은 사람이었다. 실수한 건 괜찮다고 모른 척했고 혹시 조장이 혼낼까 봐 얼른 덮어주기도 했다. 앞으로 안 그러면 된다며 다독였다. 하지만 역치를 넘기는 일이 생기면 호랑이가 따로 없었다. 사람들끼리 선을 넘거나 예의 없이 서로를 대할 땐 머리에서 선이 하나 끊어지는 거 같았다. 사람이 사람에게 최소한의 도리를 지키지 않는 걸 보면 열균 씨는 참기 어려웠다.

2023년 10월 4일, 열균 씨는 야간조라 출근 전 잠을 자고 있었다. 그런데 열어놓은 창문으로 탄내가 났다. 가끔 동네 어르신들이 쓰레기를 태우긴 했지만 이렇게 매캐하고 불쾌한 냄새는 처음이었다. 혹시 플라스틱을 누가 태우나 싶어서 나가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들어와서 핸드폰을 보자, 메시지가 200개가 넘게 와있었다. 동료들부터 동네 친구들까지 가리지 않고 불이 났는데 괜찮냐는 연락이 대부분이었다. 회사는 한 달간 기다리며 쉬라고 연락했고 열균 씨는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 워낙 일이 힘들었던 터라 쉬고 싶었다. 열균 씨 생각엔 수습하고 재건하는데 5~6개월 정도 걸릴 거 같았다. 이참에 좀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1월 4일, 회사는 문자로 청산을 통보했다.

며칠 후 노동조합이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린다는 연락이 왔다. 열균 씨는 부모님과 간단히 상의하고 ‘한번 가보라’는 어머니의 말에 가 보기로 결정했다. 막상 가보니 원래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잔뜩 와있었고 열균 씨는 생각이 깊고 계산적인 면까지 있는 사람들이 남는 걸 보면서 자신도 남아봐야겠다고 판단했다. 당시엔 ‘재건되면 좋은 건 당연하고 그게 아니라도 돈이라도 더 받을 수 있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수개월이 지나도록 회사는 미동도 없었고 선전전만 주구장창하는 투쟁은 아무 의미가 없어 보였다. 가족처럼 지내며 일했던 사람들이 우릴 무시하는 게 분했다. 이전에 같이 보냈던 시간이 다 거짓말이었던 거 같았다.

태풍이 들이닥치던 날을 기점으로 옵티칼 투쟁은 변했다. 여러 투쟁이 이어졌다. 그중 열균 씨는 시청에 항의서한을 전달하던 날이 뇌리에 남았다. 당시 항의서한만 전달하면 되는 거였다. 이전에 시청에 서류를 떼러 가끔 왔던 것과 다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기자회견이 끝나고 서한을 전달하려는데, 앞서갔던 여성 동지들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달려 가보니, 시청 직원들의 눈빛이 사나웠다. 예전에 서류 떼러 왔을 때와는 천지차이였다. 벌레 보듯이 우릴 보며 여성 동지들을 망설임 없이 밀치고 있었다. 열균 씨는 그때도 머릿속에서 선이 하나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경비와 거칠게 싸웠고 불법적인 진입 방해를 뚫고 진입에 성공했다. 무사히 항의서한을 전달할 수 있었다.

사측은 지금까지 약 일곱 번 침탈을 시도했다. 굴착기도 오고 변호사도 오고 노무사도 왔다. 청산인 자격으로 배재구 대표이사도 그때마다 왔다. 열균 씨는 배재구를 볼 때마다 ‘인간같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대표이사지만 현장에 들어오는 사람이었다. 원래는 잘 지냈고 일도 같이 잘했다. 만약 회사가 이렇게 되지 않았다면, 우연히 마트같은 곳에서 만났을 때 반갑게 안부도 물었을 사이였다. 그러나 지금의 배재구 청산인은 조합원들을 범죄자처럼 대하고 있고 이를 열균씨는 용납할 수가 없다. 가끔 회사가 조합원들에게 문자를 보내는데, 내용을 보면 ‘당신들이 돈을 밝혀서 이러는 거’라는 맥락이 담겨있다. 열균 씨는 처음엔 그 문자에 화도 났지만 이젠 웃기다. ‘뭐 눈엔 뭐만 보인다더니’ 생각도 든다.

열균 씨는 나중에 만약 투쟁이 잘 안 되더라도 이젠 다른 회사에 취직하는 건 싫다. 차라리 장사를 하지, 다른 회사에서 부당한 걸 참으면서 일하는 건 도저히 못할 거 같다고 했다. 이젠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며.

열균 씨를 인터뷰하면서 노동조합 활동이란 게 무엇일까 생각했다. ‘노동자와 자본가의 한판 붙기’보다 ‘인간이 인간이길 포기하지 않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옵티칼 현장에 연대 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요즘에 이런 투쟁이 없다’, ‘옵티칼 동지들 정말 잘 싸우고 있다’며 조합원들을 칭찬하는데, 열균 씨는 약간 어리둥절한 거 같다. 자신이 살아오던 삶의 맥락에선 이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도를 넘었을 때 몸부터 나가던 열균 씨의 삶.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참지 않았던 삶. 그게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열균 씨의 투쟁을 활동가로서 응원하지만, 그보단 한 명의 인간으로서 응원하고 싶어진다.

SNS 기사보내기

관련기사

기사제보
저작권자 © 노동과세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