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옵티칼하이테크에서 일한 박정혜 여성부장의 삶을 돌아보다

2022년 10월 4일, 구미의 한 공장에 불이 났다. 150여 명이 일하던 공장에 난 화재로 회사는 화재보험금 1,300억을 받았다. 안 그래도 일본 기업을 구미에 유치하기 위해 20년간 1만2천 평 땅을 무료로 임대하던 구미시의 제도로 혜택을 받고 들어온 일본 기업이었다. Nitto의 계열사인 한국옵티칼하이테크다. 불이 난 지 한 달 만에 회사는 화재보상금만 받고 공장을 청산하겠다고 했다. 노동자들은 문자로 통보받았다. 약 130명의 노동자는 희망퇴직하고 떠났지만 13명의 노동자는 남았다. 공장을 지키며 '고용안정 쟁취' 외치고 있다.
집회 한번 안 해봤다는 노동조합, 노동조합 사무실엔 명절 선물 받으러만 와봤다는 조합원들이 약 10개월간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처음엔 쭈뼛대고 창피해했으나 지금은 사측의 강도 높은 압박을 견디며 싸우고 있다. 이들을 한 명씩 만나서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했다. [편집자주]

비오는 날 선전전을 하고 있는 박정혜 여성부장
비오는 날 선전전을 하고 있는 박정혜 여성부장

조합원 인터뷰를 쭉 해나가면서, 사실 박정혜 여성부장을 인터뷰하길 기다렸다. 여성부장이라는 타이틀과 오래 일했다는 점, 배재구 대표이사와 긴밀히 소통했던 사람이라는 점, 조장이라는 위치 등의 특징을 가진 사람이 어떨지 너무나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정혜 여성부장은 오히려 다소 부수적인 특징들보다 노동자의 핵심적 고민과 가치를 가지는 사람이었다. 이번 글은 많은 사람이 꼭 읽어주었으면, 그래서 박정혜 조합원의 고민을 나눠가지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2011년 2월 28일, 정혜 씨가 한국옵티칼하이테크에 입사했다. 정혜 씨는 관광학과를 졸업하고 호텔, 온천, 컨벤션, 일식당 등에서 일했기 때문에 공장 노동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공장 노동은 모든 게 낯설었다. 방진복도 답답하고 하루 12시간 노동도 힘들었지만 ‘원래 이런 건가 보네’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배웠다. 정혜 씨는 외관 검사 공정으로 입사했는데, 처음엔 불량 검사가 어려웠다. 900장을 1시간 안에 검사해야 했다. 1장당 8초 밖에 없었다. 정혜 씨는 검사를 잘하는 건 모르겠고 일단 시간 안에 물량을 쳐내기 바빴다. 불량을 자꾸 놓치니까 혼이 나기도 했다. 1년이 조금 넘었을 무렵, 정혜 씨는 일이 익숙해졌다. 기계 잘못으로 불량이 잔뜩 났을 땐 잘하는 사람만 불러서 빠르게 일하도록 했는데, 정혜 씨는 항상 선별된 검사자 중 하나였다. 그렇게 불려갈 때면 속으로 ‘나 이제 잘하나보네’라고 생각했다.

2019년 1차 희망퇴직 후 정혜 씨는 리더가 됐고 2020년 2차 희망퇴직 후엔 조장이 됐다. 희망퇴직이 시행될 때마다 생각은 해봤으나, ‘잘리면 다른 데 찾아보더라도 내가 먼저 그만두진 말자’고 결정했다. 정혜 씨가 경험한 유일한 공장 노동이 옵티칼이었다. 다른 현장의 환경을 전혀 모르는데 퇴직한다는 건 막막하고 두려운 일이었다. 조장이 된 정혜 씨는 고생스럽게 일했다. 원래 조장이 되고 싶지도 않았다. 불량이 발생하면, 어디가 잘못돼서 불량이 났는지 고민하고 찾아보는 일을 해야 했다. 업무 메일을 보내는 것도 많이 해야 했다. 그런 일에 익숙하지 않아서 ‘정혜 씨가 조장을 맡아주었으면 좋겠다’고 회사가 찾아왔을 때, 정말 하기 싫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남은 노동자가 약 57명 밖에 안 됐다. 심지어 조장들이 많이 퇴직한 터라 ‘어쩌면 나한테 시키겠는데?’하고 안 그래도 불안했다. 결국 정혜 씨는 울며 겨자 먹기로 조장을 달았다. 회사는 공정이 많은데 노동자는 적으니, 조장들에게 1인당 공정 2-3개를 담당시켰다. 정혜 씨도 ‘외관’과 ‘수입’ 공정을 동시에 맡았는데, 수입 공정은 입사하고 처음이었다. 게다가 조장으로 담당해야 하니, 정말 진땀 뺐다.

코로나로 중국이 셧다운되면서 해당 물량이 옵티칼로 넘어오게 됐는데, 100명이나 노동자를 더 뽑았지만 물량은 보통 많아진 게 아니었다. 정혜 씨는 넘쳐나는 물량을 맞추느라 죽기 살기로 일했다. 이때 공장은 주말과 공휴일엔 쉬고 평일에 일하는 시스템이었으나 주말 중 하루는 특근을 하느라 6일 일하고 하루 쉬는 시스템으로 한동안 일했다. 그래도 물량을 감당 못해서 식사 시간에 후루룩 밥을 먹고 그 시간도 쪼개서 일했다. 정혜 씨만 그러는 게 아니었다. 다들 그랬다. 망해간다는 내 회사, 700명이 넘던 노동자를 약 57명으로 줄인 나의 공장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다들 자신의 최우선 순위를 ‘공장 살리기’로 생각하고 일했다.

2022년 10월 4일, 정혜 씨는 집에서 야간조로 출근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슬슬 밥 먹고 씻으면 되겠다고 생각할 무렵, 직장 동료 카톡방이 울렸다. 공장에 불이 났다는 소식이었다. 정혜 씨는 바로 뛰쳐나왔다. 씻지도 않고 얼른 차를 몰아서 곧장 공장으로 갔다. 공장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샌드위치 판넬로 만들어진 공장은 불이 나면 전소(全燒)될 수 밖에 없다는 걸 정혜 씨는 알고 있었다. 정혜 씨는 부장님을 붙들고 우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부장님, 불 나서 어떡해요. 공장 어떡해요”라며 정혜 씨는 계속 눈물을 흘렸다. 구미 옵티칼에서 일하기 전 정혜 씨는 충주, 울산, 대구 등을 옮겨 다니며 보금자리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정혜 씨와 동생, 오빠는 모두 각자 자신의 생활을 알아서 책임져야 했기에 일자리를 찾아다니느라 긴 시간 떨어져서 지냈다. 그러나 정혜 씨가 옵티칼에 다니면서 집도 구하고 차를 사는 등 자리를 잡았고 동생과 같이 살게 됐다. 그 후로 오빠네 가족도 구미에서 살게 됐다. 경제적으로 나아짐으로써 보금자리를 만들게 해준 공장인데, 눈앞에서 불타고 있었다.

회사는 대부분의 노동자에게 한 달간 기다려달라고 했지만, 외관 검사원들에겐 달랐다. 구미 공장의 물량을 평택 공장이 받았다. 평택 공장은 구미 LGD(LG 디스플레이)로 완성된 필름을 보냈다. 옵티칼 외관 검사원 중 일부는 10월 한 달간 LGD로 출근해서 불량 검사를 해야 했다. 정혜 씨는 회사가 나아지기 위해선 자신이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기를 쓰고 LGD로 출근했다. 원래 거기서 일하던 노동자가 아니니까 방진복도 사이즈가 안 맞았고 신발도 작았다. 그래도 몸을 구겨 넣고 발을 욱여넣었다. 무조건 뭐라도 해야 했다. 공장이 괜찮아지는 데에 작은 도움이라도 돼야 했다.

2022년 11월 4일, 청산 문자가 왔다. 회사는 퇴직금 설명회를 열었고 정혜 씨도 참석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나 들어보려는 생각이었다. 김정수 노무사가 퇴직금에 대한 설명을 하는데, 뭔가 이상했다. 하루 일한 사람과 9년 일한 사람의 퇴직금이 같았다. 노무사는 “하루 일한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상황을 고려해서 이렇게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한 사람이 손을 들고 말했다. “그럼 왜 오래 일한 사람의 가치는 고려해주지 않습니까?” 노무사는 “그럼 전에 희망퇴직 있을 때 나가지 그러셨어요? 회사 어려울 때 안 나갔잖아요.”라고 무시하듯 답했다. 어이없었다. ‘회사 어려울 때 전부 다 나갔어야 한다는 거야? 남은 사람들이 떠난 사람들 몫까지 죽기 살기로 일했잖아. 우리 덕에 그때 회사는 돈 엄청 많이 벌었잖아. 그런데 왜 저렇게 말해? 남은 사람들은 회사를 위하지 않은 것처럼 말하면 안 되지.’ 그날, 정혜 씨는 투쟁에 대한 마음을 굳혔다. 안 그래도 화재에 대응하기 위해 노조가 꾸린 비상대책위원회에 나가며 투쟁을 고민하고 있었다. 노무사는 정혜 씨의 분노를 키웠고 아이러니하게도 정혜 씨의 투쟁 결정에 큰 도움이 됐다.

문화제에서 노래에 맞춰 박수치는 박정혜 여성부장
문화제에서 노래에 맞춰 박수치는 박정혜 여성부장

이후로 정혜 씨는 여러 싸움을 경험했다. 태풍이 왔을 때, 시청과 사측은 안전을 핑계로 공장 침탈을 시도했다. 정혜 씨는 처음에 ‘안전 때문이면 들여야 하나?’라고 생각했으나 KEC 조합원들이 “안전 때문인데 태풍 오는 당일에 옵니까? 정말 그거 때문이면 미리 왔겠죠. 핑계 대지 마세요.”라며 그들을 막아섰다. ‘아, 그렇구나’ 정혜 씨는 옆에서 깨달았다. 자신이 세상 물정을 모르고 살았다고 느꼈다. 공장 사수 투쟁을 하는 지금, 사측은 굴착기도 갖고 오고 인부도 데려오고 청산인이 변호사, 노무사를 데리고 찾아오기도 한다. 하지만 그때마다 잘 막아냈다. 정혜 씨는 굴착기가 온 날, 노조 사무실 건물 옥상에 올라가면서 생각했다. ‘사측은 어차피 진짜로 들어오려는 게 아니야. 쇼하는 사람들한테 우리가 더 강하고 단단한 걸 보여줘야 해.’

투쟁이 1년 정도 된 지금, 정혜 씨는 전혀 지치지 않았다. 하루에 12시간씩 일하던 공장 노동과 지금을 비교하면, 지금은 힘들지 않다. 그리고 자신이 나약해지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나약해지면, 내 투쟁도 나약해져. 최선을 다해서 싸우면 그 보상을 언젠가 받을 거고 만약 싸움이 나약해지면 그 대가도 언젠가 받을 거라고 생각해.” 

정혜씨를 인터뷰하면서 자꾸 전태일이 생각났다. 집안이 넉넉하지 않아서 어릴 때부터 일했다. 회사가 잘 되면 자기도 잘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식사 시간도 쪼개가면서 일했지만, 조원들에겐 ‘밥 먹는 시간만큼은 다 채워서 쉬자’고 배려했다. 자신이 세상 물정 몰랐다는 걸 투쟁하며 알아갔다. 자신의 노동과 투쟁에 열정이 넘친다. 참 비슷하다. 전태일의 ‘나는 너다’라는 말이 정혜 씨의 얼굴에 전태일이 겹쳐 보이는 걸 설명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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