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옵티칼하이테크에서 일한 배현석 조합의 삶을 돌아보다

2022년 10월 4일, 구미의 한 공장에 불이 났다. 150여 명이 일하던 공장에 난 화재로 회사는 화재보험금 1,300억을 받았다. 안 그래도 일본 기업을 구미에 유치하기 위해 20년간 1만2천 평 땅을 무료로 임대하던 구미시의 제도로 혜택을 받고 들어온 일본 기업이었다. Nitto의 계열사인 한국옵티칼하이테크다. 불이 난 지 한 달 만에 회사는 화재보상금만 받고 공장을 청산하겠다고 했다. 노동자들은 문자로 통보받았다. 약 130명의 노동자는 희망퇴직하고 떠났지만 13명의 노동자는 남았다. 공장을 지키며 '고용안정 쟁취' 외치고 있다.
집회 한번 안 해봤다는 노동조합, 노동조합 사무실엔 명절 선물 받으러만 와봤다는 조합원들이 약 10개월간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처음엔 쭈뼛대고 창피해했으나 지금은 사측의 강도 높은 압박을 견디며 싸우고 있다. 이들을 한 명씩 만나서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했다. [편집자주]

한국옵티칼하이테크 정문에서 투쟁을 외치는 배현석 조합원
한국옵티칼하이테크 정문에서 투쟁을 외치는 배현석 조합원

한국옵티칼하이테크 노동조합을 만나러 전국에서 100여 명이 구미로 모인 적이 있다. 그때 조합원은 자신의 이야기를, 연대자는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여기에 왔는지를 서로에게 돌아가면서 말해주었다. 그 자리에서 가장 먼저 입을 뗀 조합원이 배현석 회계감사였다. 배현석 조합원은 달변가는 아니었지만 ‘예전엔 고민이 많았지만, 이기고 싶습니다’라는 진심이 느껴지는 말로 연대자들의 마음을 울렸다. 지난 주말, 배현석 조합원을 인터뷰해 글로 정리했다.

2005년 7월, 현석 씨가 의경으로 군대에 입대했다. 딱히 의경이 되고 싶은 건 아니었다. 시력 때문에 해병대를 떨어지고 제일 빨리 입대할 수 있는 곳을 찾았는데 그게 의경이었다. 훈련소와 경찰학교 교육을 마친 후 현석 씨는 서울 남대문경찰서의 1기동대 소속이 되었다. 온갖 ‘데모’에 따라가서 완전 진압복을 입고 방패를 들었다. 집회에 대해 아무 생각도 없었기 때문에 집회가 좋지도 싫지도 않았다. 별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의경은 경찰 버스로 만들어진 차 벽 뒤에 있었다. 집회참가자가 하는 발언, 들고 있는 피켓은 잘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이런 거 왜 하지. 이럴 시간에 가서 돈 버는 게 나을텐데’라는 생각만 했다. 당시 현석 씨 주변 의경은 다들 비슷한 생각을 했다. 집회의 목적도 잘 모르는 의경들은 수만 명(때로는 수십만 명)의 노동자, 농민이 모여서 집회를 하는 걸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24개월 복무를 마치던 즈음, 현석 씨는 ‘나는 나가면 집회하는 사람은 안 될 거야’라고 생각했다.

현석 씨는 제대 후 약 1년간 병원 보안요원으로 일했다. 자꾸 사람들과 싸우고 제압해야 하는 일이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느꼈다.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현석 씨의 친형에게서 연락이 왔다. ‘현석아, 구미로 와서 일하는 거 어때?’ 형은 구미에서 이미 자리 잡고 일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현석 씨는 구미로 왔고 삼성의 핸드폰을 만드는 협력업체 소속으로 일을 시작했다. 해당 업체는 삼성의 핸드폰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만들었다. 처음에 핸드폰 만들 자재를 가져오는 일부터 맨 마지막에 ‘SAMSUNG’이라고 로고를 붙이는 일까지 싹 다 협력업체가 했다. 그러면 삼성은 그걸 가져다가 파는 거였다. 그러나 그 당시 현석 씨는 그게 이상하다는 생각도 못했다. 공장 노동은 처음이었으니까 ‘원래 이렇게 하나보네’ 생각했다. 현석 씨는 자재를 관리하는 업무를 맡았는데, 잘했다. 일 못한다는 소리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었다.

3년 정도 일했을 무렵, 현석 씨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장례식장에서 친형의 회사 사람들이 왔다. 그때 친형이 일하던 곳이 한국옵티칼하이테크였다. 인사를 나눴는데 그중 옵티칼의 이사도 있었다. 이사는 현석 씨가 괜찮아보였는지 ‘장례식이 끝나면 이력서 한번 넣어봐요’라며 마음에 드는 티를 냈다. 현석 씨는 이력서를 넣었고 합격했다. 2010년 11월 29일, 현석 씨가 한국옵티칼하이테크에 입사했다. 옵티칼은 전 직장보다 월급이 많았다. 방진복을 입고 일하는 게 답답하기도 했고 일도 힘들었지만, ‘월급이 많으니까’라며 열심히 일했다.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모른다. 입사할 때 약 85kg였던 현석 씨는 입사하고 한 달 만에 약 68kg가 됐다. 별다른 운동을 하거나 다이어트를 한 것도 아닌데 약 17kg 빠졌다. 죽기 살기로 일했다. 현석 씨는 그 후로도 계속 열심히 일했고 이른바 ‘고속 승진’을 했다. 입사 후 1년이 채 되지 않아서 ‘리더’가 되었고 또 1년 3개월정도 지나선 ‘조장’이 됐다.

2020년, 회사는 2차 희망퇴직을 실시했다. 현석 씨는 1차 희망퇴직에선 고민도 하지 않고 남기로 했으나, 1년 만에 또 시행한다는 말에 고민이 많았다. 아내와 상의도 많이 했다. 그러나 현석 씨는 역시 남기로 결정했다. 이성적인 판단이었다. 솔직히 희망퇴직금이 너무 적었다. 만약 회사가 현석 씨를 정리해고를 한다고 해도 하루아침에 잘라버리는 건 아니었다. 절차에 맞춰서 걸리는 시간이 있을 거였다. 그 시간 동안 현석 씨가 받을 월급을 합치면 퇴직금만큼은 됐다. 퇴직금이 너무 적어서 생긴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2차 희망퇴직이 끝나고 남은 노동자는 고작 56명이었다. 현석 씨는 조장이니까 기존엔 업무 분배 및 조정이 주업무였다. 현장 노동을 많이 하진 않았다. 그러나 인원이 너무 줄어버리자, 현석 씨는 조원들과 함께 현장 일을 했다. 배재구 대표이사가 상의할 게 있다며 찾아와도 “일은 많고 사람은 없는데 저보고 어쩌라고요. 상의할 시간 없습니다”라고 현석 씨는 당당히 말했다. 곧 회사는 희망퇴사자 중 일부를 계약직으로 재채용하며 우왕좌왕했다. 현석 씨는 “이럴 거면 왜 내보냈습니까. 장난칩니까”라며 화를 내기도 했다. 처음부터 희망퇴직자 인원을 조절했어야 했다. 너무 많은 노동자를 내보내니, 대표와 상의할 시간도 못 낼 정도로 바빠지기도 했고 사람들을 내보냈다가 다시 들이는, 어리석은 짓도 하게 된 거였다.

2021년, 코로나가 세계적으로 심각해졌다. 중국은 공장을 비롯해 많은 걸 ‘셧다운’했고 그 대상엔 편광필름 공장도 당연히 있었다. 핸드폰용 편광필름을 중국 외의 국가에서 받아야 하는 애플(Apple)은 급히 NITTO에게 문의했고 그 물량이 한국옵티칼하이테크로 넘어오게 되었다. 물량이 늘어난 건 공장에게 좋은 일이지만, 그때까지 옵티칼은 한 번도 핸드폰용 편광필름을 제작해본 적이 없었다. 물량이 늘어났다고 갑자기 사람도 잔뜩 채용됐다. 100명에 가까운 노동자가 들어왔다. 현석 씨의 조도 예외는 아니었다. 약 8명이었던 조원이 40명이 됐다. 회사는 조장들에게 한 달 안에 조원들을 가르쳐서 필름을 만들어내라고 했다. 거의 기적을 만들어내라는 수준이었다. 공장이 어수선했다. 제대로 할 줄 아는 사람은 없는데 인원만 커졌다. 사람들은 다들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을 뿐 ‘이러다가 큰일 나겠는데’ 생각했다. 실제로 필름 절단기에 손이 끼이거나 필름을 들고 이동하다가 계단에서 사람이 구르는 등 크고 작은 안전사고가 자주 발생했다.

2022년 10월 4일, 현석 씨는 야간출근이라 아이들을 씻긴 후 저녁을 먹이고 있었다. 아내가 말을 걸었다. “오빠, 4공단에 불난 거 같아” 창문 밖으로 검은 연기가 엄청났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한국옵티칼하이테크였다. 직원들 SNS 방에 올라오는 사진에서도 보통 불이 아닌 게 보였다. 조원들에게 오늘 출근하지 말라고 한 후 현석 씨도 심란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노동조합은 비대위를 꾸렸고 현석 씨도 함께 했다. 청산할 거라는 소문이 돌았고 배재구 대표이사는 노동조합에게 대놓고 청산할 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석 씨는 ‘설마 청산을 진짜 하겠나. 솔직히 전원은 아니더라도 조금이라도 평택으로 보내주겠지’라고 생각했다. 연차가 높고 직책도 높았기에, 현석 씨는 자신은 평택으로 보내질 거라는 다소 개인적이면서도 희망찬 생각도 했다. 하지만 현석 씨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회사는 청산 문자를 보냈고 ‘한 방에’ 노동자들을 다 내보냈다.

회사는 청산 통보 후 전체 인원에 대한 희망퇴직을 받았다.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에게 함께 싸우길 제안했다. 현석 씨는 고민이 많았으나 결국 투쟁을 선택했다. 사실 현석 씨는 지금 와서 그 당시를 돌아보면 후회 아닌 후회를 한다.

한국산업단지공단에서 항의 피켓팅을 하는 배현석 조합원
한국산업단지공단에서 항의 피켓팅을 하는 배현석 조합원

“이렇게 싸우게 될 줄 몰랐죠. 알았으면 안 싸웠을 거에요. 남들한테 피해만 주고 있는데.”

현석 씨는 ‘이렇게’ 싸우게 될 줄 아는 상태에서 과거로 돌아간다면, 싸우지 않을 거다. 이길 자신이 없기 때문도 아니고 가압류나 굴착기에게 겁먹은 것도 아니다. 자신의 투쟁이 미안하기 때문이다. 가족들에게도, 조합원 동지들에게도 미안하다. 아이가 둘인데 어리다. 마구 뛰어다니는 6살과 3살을 아내가 거의 혼자 돌봐야 하는 상황이 미안하다. ‘오빠 언제쯤 끝날까?’라고 가끔 아내가 물을 땐 할 말이 없다. 그렇다고 노동조합에선 마음이 편하냐면 그것도 아니다. 아이를 최대한 돌보고 가사노동을 함께 하느라 서울, 대구, 평택, 일본까지 여러 지역을 다니는 활동은 하기가 어렵다. 지역을 이동하며 시간을 많이 써야 하는 활동은 다같이 돌아가면서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많이 미안하다. 자신이 조합원들에게 피해를 주는 거 같다. 만약 이리저리 다니며 싸워야 한다는 걸 미리 알았다면 투쟁에 합류할 생각도 못했을 거다. 다른 조합원들이 자신의 몫까지 애쓰는 걸 보면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현석 씨는 ‘저희가 뭐라고 이렇게 도와주시는지...’라며 연대자에게도 고맙고 미안한 마음에 말끝을 흐렸다.

인터뷰 중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는 현석 씨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런데 얼굴을 보고 말하기 민망해서 하지 못했다. 걱정말라고. 조합원들은 다 알 거라고. 당신이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다들 알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당신의 ‘미안함’이란 감정은 동지들이 소중하기 때문에 생긴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소중하지 않으면 미안하지도 않다. 소중하지 않으면 어려운 투쟁에서 나만 빠졌을 때 미안함은커녕 좋고 편하다고만 생각한다. 동지들이 소중해서 투쟁의 무게를 똑같이 메지 못하는 미안함, 참 귀하다. 귀하고 소중한 마음이다. 그 마음이 변치 않길. 아니, 조금 더 편히 기댈 수 있도록 조금만 가볍게 변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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