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의료노조 충북적십자기관지부 권미리 회계감사

3.8 여성의 날은 지났지만 충북지역 여성조합원들의 삶과 일터의 이야기는계속됩니다. 여성노동자들이 원하는 일터의 모습, 노동조합의 역할을 생각하며 3.8 세계여성의날 정신을 잇습니다.

 

# 든든히 헌혈의 집을 지키는 6년차 간호사

안녕하세요, 충북적십자기관지부 권미리 회계감사입니다. 헌혈의 집과 헌혈버스에서 헌혈을 위한 문진, 채혈 업무를 주로 하는 간호사입니다. 입사한 지 6년 되었어요. 어렸을 때 사회봉사에 관심이 많아서 관련 일을 찾았는데 부모님께서 사회·복지 분야는 나이가 들어도 할 수 있으니 젊었을 때 전문적인 일을 해봤으면 좋겠다고 제안하셨어요. 그래서 선택한 직업이 간호사입니다. 환자를 돌보면서 봉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막상 간호사로 일해보니 근무 환경이 매우 열악하더라고요. 간호사라는 직업을 섣불리 추천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아버지께서 현대에서 제조업 일을 하셨는데 그 때 노동조합 활동을 굉장히 열심히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노동조합 활동을 하겠다고 했을 때 어머니께서 반기지 않으셨죠. 아버지처럼 물불 안가리고 노동조합 활동을 할까봐 걱정하셨거든요. 세대가 달라서 아버지처럼 온몸을 불사르며 할 일은 없으니 너무 걱정말라고 했죠.

보건의료노조 충북적십자기관지부 권미리 회계감사
보건의료노조 충북적십자기관지부 권미리 회계감사

 

# 간부라는 유니폼을 입다

동기 언니가 회계 감사였는데 임기가 만료되어 그 자리를 제가 맡게 됐어요. 지부장님이랑 동기이기도 하고, 그 때 마땅한 지원자도 없었거든요. 그런데 간부하길 너무나 잘했어요. 간호팀 뿐만 아니라 총무팀 등 타 직종 선생님들과도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어요. 이제는 친해져서 추억도 가득 쌓였죠.

한가지 아쉬운 건 회계감사 임기가 3년이라 올 해가 마지막이라는 거에요. 임신중이어서 연임을 못하게 됐거든요. 내년에 제 자리에 다른 분이 오실텐데 그 분이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정말 값진 기회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처음엔 어리둥절하지만 한 번 경험하면 노동조합 활동이 즐겁다는 것을 알게되거든요. 회사에 대한 이해도도 높아지고 타 직종의 어려움도 접할 수 있죠. 세상을 폭넓게 볼 수 있어요.

 

# 파업으로 집을 뜯어 고치다

입사 후 3년이 지나자 코로나로 팬데믹이 길어졌어요. 열악한 근무환경 때문에 간호팀 선생님들이 질병으로 휴직과 병가에 들어가게 됐어요. 인력이 부족해지자 한달에 주말 근무 4개를 해도 대체 휴무를 2개밖에 받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죠. 다들 신경이 날카로워졌어요. 이런 상황이 얼마나 지속될 지 가늠조차 되지 않아서 이직도 고려했어요. 회사에 인력충원을 요청했는데 병가·휴직자를 포함하면 TO(정원)가 초과된다며 거부했죠. 아픈 선생님들은 우리에게 미안해하며 할 수 있는 최대한 근무하다 치료받으러 가셨어요. 그런데 노동조합에서 정식으로 문제 제기를 하자 일단 계약직이라도 채용해줬고, 모든 센터를 열지 않고 일부 센터만 지정해서 오픈하는 식으로 주말 근무 수를 조율해줬어요. 그제야 숨통이 트이더라고요.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달았죠.

2021년엔 보건의료노조가 파업 직전에 극적으로 정부와 타결했잖아요, 원래 헌혈의 집은 토요일이면 20시에 문을 닫았거든요. 타결 후엔 종료 시간이 18시로 변경됐죠. 운영 시간은 국가에서 지정된 사안이라 절대 바뀔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노동조합이 바꿨어요. 이제 주말 저녁 시간을 가질 수 있다니, 꿈같은 일이었죠. 몇 년 안 됐는데 잠깐 사이에 굉장히 많이 변했네요.

 

# 뼈아픈 우리집, 애환을 달리는 버스

헌혈의 집은 특성상 11시부터 20시까지 근무해요. 근무자 대부분이 여성이잖아요, 여성은 퇴근 후에도 돌봄 노동을 하다 보면 금방 새벽이 돼요. 할 일이 산더민데 화장도 못지우고 아이 옆에서 잠들었다고 말씀하실 때면 마음이 아프죠. 새벽에 잠들면 그만큼 늦게 일어나니까 아침 시간도 활용하지 못하거든요. 악순환이 반복되죠. 헌혈의 집 운영 시간은 헌혈자가 가장 많이 오는 시간대에 맞추어졌다는 걸 알지만 이제는 헌혈자뿐 아니라 여기서 일하는 노동자의 근무조건도 고려해서 운영 시간을 정했으면 좋겠어요.

헌혈의 집은 문진, 채혈뿐 아니라 문을 열기 전부터 닫은 후까지 잡무가 굉장히 많아요. 본격적인 채혈을 하기까지 준비해야 될 것도 많고 기계 고장 등 돌발적인 상황도 많이 발생합니다. 그런 탓인지 민원인도 많은 편이에요. 한 번은 헌혈자에게 기념품을 골라달라고 했는데 기념품은 필요 없고 아가씨를 불러줘 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 말을 듣자마자 너무 불쾌했지만 그 곳에 저랑 그 아저씨(민원인) 둘만 있었거든요, 제가 화를 내면 저에게 폭력을 행사할 것 같은 느낌이 순간적으로 팍 들었어요. 결국 장난이어도 그런 말씀하시면 안 된다고 정중히 안내만 드렸죠. 미안하다는 말없이 도망가시더라고요. 그 날 하루 종일 기분이 나빴어요.

헌혈하러 자주 오시는 분이었어요. 그 분이 혈장을 해야해서 1시간 정도 누워 있어야 했죠. 한 쪽 팔엔 바늘을 꽂아서 다른 팔만 움직일 수 있었는데 그 분이 바지 뒷주머니를 가리키더니 엉덩이에 있는 종이를 꺼내달라고 하셨어요. 그러려면 선생님의 신체를 만져야해서 꺼내드릴 수 없다고 말씀드렸어요. 대신 메모가 필요하면 다른 종이를 드릴 테니까 거기에 적으라고 했는데 그래도 안 된다며 엉덩이에 있는 종이를 꺼내달라고 하시더라고요. 그건 안된다고, 재차 거절하고 돌아서는데 그 분이 다른 선생님을 부르더니 같은 부탁을 하셨어요. 제가 안 된다고 또 말씀드렸지만 그거 하나 꺼내는 게 그렇게 힘드냐며 억지 부렸죠. 큰소리를 들은 센터장 선생님까지 나와서 거절하니까 단념하시더라고요. 그 분(민원인)이 우리를 가리키곤 당신들 유난이라며 이상한 사람 취급하는데 기분이 한없이 가라앉았어요.

작년 청주대학교 헌혈의 집에서 근무했을 때였어요. 헌혈 경험이 많은 다회자가 방문했죠. 보통 헌혈자를 문진할 때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폐쇄된 방에서 진행하거든요. 그런데 그 분이 방에 들어오자마자 담당 간호사에게 이것저것 묻지 말고 (바로 헌혈)해라, 어차피 헌혈 많이 해서 다 알고 왔다, 대답도 귀찮으니 그냥 (헌혈)해라 라고 말하며 강압적인 태도로 몰아붙이셨어요. 문진 후에 결격 사유가 없어야 헌혈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지만 막무가내였죠. 다시 안내를 드렸지만 헌혈 몇 번을 했는데 짜증 나게 하지말라며 고함치다가 가셨죠. 밖에서 다 들릴 정도였는데 너무 무서웠어요. 나중에 그 분이 또 오셨는데 그 때는 남성 헌혈자가 몇 분 계셨거든요. 남성 헌혈자가 제지하니 난동 피우지 않고 바로 가시더라고요. 시대가 많이 변했다지만 아직도 여성끼리만 있으면 항상 위험에 노출되는 현실이 씁쓸해요.

헌혈버스도 간호사의 애환을 안고 달려요. 고등학교에 갔을 때였죠. 덩치 큰 남학생이 헌혈을 못하게 되자 왜 헌혈을 못하냐며 간호사 선생님께 욕설을 퍼부었어요. 간호사가 남성이었으면 그렇게까지 위협적으로 대했을까 싶어요.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학교에서 원래 말썽을 피우던 친구여서 퇴학했다고 하더라고요.

또 학생들이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간호사를 가리키며 다 들리게 “저 아줌마가 그랬다.”고 이야기해요. ‘간호사’라는 엄연한 호칭이 있는데 굳이 아줌마라는 호칭을 고수하는 거 보면 일부러 우리를 깎아내리려고 하는 것 같아요. 잘못된 호칭은 사람을 우습게 만들잖아요. 아줌마, 이모, 언니, 아가씨 모두 마찬가지죠. 아주 가끔 ‘간호원’이라고 부르는 분도 계세요. 같은 근무복을 입는데 남성 간호사에겐 의사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여성 간호사에겐 아가씨라고 해요. 성 고정관념이 여전해서 남자면 의사고 여성이면 간호사겠거니 생각하는 분도 많아요.

물론 헌혈을 의미있게 생각하는 시민분이 오시면 보람과 가치를 느끼고 일에 자부심을 가져요. 인류애도 충전되고 종일 감사한 마음으로 열심히 하죠. 하지만 반대로 무례한 분을 만나면 가득했던 인류애가 상실되고 종일 불쾌해져요. 그런 일을 겪으면 분명 가해자가 잘못했다는 걸 알지만 제가 존중받지 못하니까 일도 싫어지고 무기력해져요. 의욕도 상실되고요.

 

# 우리집 자랑

충북혈액원은 다른 병원과 달리 직원이 임신하면 다들 축하해주고 많이 배려해주세요. 성별에 무관하게 육아휴직을 독려하죠. 제가 혈액원 입사 전에 강남○○병원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3개월 근무했거든요, 그 때 어떤 분이 임신하셨는데 파트장에게 혼날까 봐 임신을 숨기고 선배들에게 먼저 상담하더라고요. 임신해서 나이트를 못할 수 있는데 파트장님께 어떻게 말씀드리냐며 안절부절하셨죠. 불안해하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네요.

임신·출산 문제는 간호사에 국한되지 않아요. 사촌 언니는 다니던 회사에서 육아휴직을 줄 수 없다며 권고사직을 당했고, 결국 회사를 그만뒀어요. 여성들은 그렇게 직장을 나가면 경력이 단절되어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요. 영원히 주부가 되거나 열악한 비정규직 일자리에 가게 되죠.

2023년 7월 보건의료노조 파업 현장 / 권미리 회계감사(우측 아래)
2023년 7월 보건의료노조 파업 현장 / 권미리 회계감사(우측 아래)

 

# 초보 간부, 성장하다

작년 7월, 서울과 세종에서 했던 파업이 기억에 남아요. 한목소리를 내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모였다는 자체가 설레고 뿌듯했어요. 노동조합의 저력을 보여준 현장에 제가 있었다니 가슴 벅차는 일이죠. 억수를 맞아서 잊을 수 없기도 하고요. 그 해 6월에 파업을 준비하며 진행했던 아침 선전전도 자연스레 떠오르네요. 조합원 여럿이 회사 곳곳에서 피켓을 들고 있으니 감회가 새로웠어요. 그런 기회가 많지 않거든요. 처음엔 두려웠는데 서로 북돋아 주니까 든든해졌죠.

강원·대전충남지역본부와 함께한 총파업학교도 신선한 충격이었어요. 덕분에 다른 지역 지부장님을 만날 수 있었죠. 값지고 재밌는 경험이었어요. 모두 파업을 앞두고 걱정이 태산이었지만 그만큼 파업을 향한 의지도 강했거든요. 덕분에 저도 파업이 실감나고 관심도 높아졌죠. 모두 병원에서 일하니까 비슷한 문제를 두고 의견을 공유한 덕에 다양한 사례를 접할 수 있었어요. 노동조합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 지역에 따른 고충, 노동조합이 바꾼 변화가 무엇이 있었는지 공부하는 시간이었어요. 노동조합 활동(회계감사)을 안 했으면 다른 지역 간부들과 이야기 할 수 있는 기회도 없었겠죠. 많은 사람을 만나고 노동조합을 다각적으로 이해하는데 확실한 도움이 되었어요.

2023년 6월, 보건의료노조 파업 조직을 위한 조출 선전전 / 권미리 회계감사(우)
2023년 6월, 보건의료노조 파업 조직을 위한 조출 선전전 / 권미리 회계감사(우)

 

# 화목한 집을 만들기 위한 여정

첫째로 ‘여성 직업’이라는 인식이 바뀌어야 해요, 간호사는 성별에 관계없이 여성, 남성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둘째로 간호사라는 호칭이 안정적으로 정착해야돼요. 의사를 가리키며 오빠, 총각, 아저씨, 삼촌이라고 부르지 않잖아요, 간호사도 전문직이라는 명확한 인식을 가지고 존중해주었으면 좋겠어요.

셋째로 모든 직원이 익명으로라도 자신이 가진 고충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돼야 해요. 그러면 총회 때 해당 고충을 공유하며 대안을 마련할 수 있으니까요. 당장 명확한 대안이 없더라도 이야기를 꺼내거나 공감을 하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될 것 같아요. 혹은 누군가는 그 이야기를 듣고 ‘나도 저런 일이 있었는데 그게 잘못된 일이구나.’ 하고 깨달을 수 있고요. 성희롱이 발생했을 때, 분명 성희롱인데 의외로 많은 사람이 ‘애매한데 성희롱일까? 내가 잘못 생각한 게 아닐까?’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럴 때 ‘그건 명백한 성희롱이니 이렇게 대처하자.’고 말해주면 위안과 힘이 되잖아요. 마음에 담아둘 게 아니라 서로 공유해서 해결하는 게 중요해요.

마지막으로 헌혈자나 민원인이 대기하면서 모니터로 볼 수 있도록 경고 사항을 송출해주었으면 해요. 민원인이 분명히 인지할 수 있도록 성희롱에 해당하는 행동을 안내하고 호칭을 똑바로 불러야한다는 주의를 주는 거죠. 그렇게 우리가 차근히 바꿔나가면 헌혈의 집이 화목해지는데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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