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인의 동지로 만나는 페미니즘
명인의 동지로 만나는 페미니즘

내가 페미니스트, 혹은 인권교육을 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이런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 많다. 아무 때나 지적질을 당할까 두려워하거나, 인권의 모든 사안에 대해서 나에게 정답을 요구하거나. 그럴 때 나는 생각한다. 사람들은 왜 잘못이나 실수를 지적받는 일을 그리 두려워할까? 사람들은 정말로 ‘자기는 누구에게도 상처를 줄 수 없는 완벽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잠재적 가해자’라는 말을 억울해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저는 두 아이의 엄마입니다.” 자기소개를 할 때 흔히 언급될 만한 이 짧은 문장을 한 번 뜯어보자. 특별한 언급이 없는 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소개를 듣고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 사람은 결혼을 했고, 남편이 있고, 적어도 두 번의 임신과 출산을 했고, 그래서 지금은 두 아이를 키우고 있는 여성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의 생각이 당연한 것처럼 ‘무심히’ 이런저런 질문이나 말을 건넬 것이다.

필자도 두 아이의 엄마다. 내 경우를 예로 들어 저 간단한 문장을 다시 뜯어보자. 나는 이 사회에서 지정한 성별과 내가 느끼는 성별정체성이 일치하는 ‘시스젠더’ 여성이다. 나는 시스젠더 남성과 결혼한 이성애자다. 나는 남편과 이혼하거나 사별하지 않았기에 현재 남편이 있다. 다시 말해 나는 단지 나의 무신경함으로 트랜스젠더나 동성애자 등의 성소수자들, 또 결혼을 했어도 남편이나 아이가 없거나, 혹은 비혼인 사람들이 마치 존재하지 않는 듯 말하거나 (배제), 그들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얘기다. 내가 조금도 그럴 의도가 없더라도, 내가 언제나 그들을 의식하고 조심하며 말하고 행동하지 않는 한.

한편, 나는 아이를 낳은 적이 없다. 사랑하는 두 아들이 있지만 그 아이들을 내가 낳지는 않았단 뜻이다. 나는 산부인과에 검진을 받으러 갈 때마다 문진표에 있는 ‘자녀’ 칸에 둘이라고 썼지만 출산 경험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을 해야 한다. 나는 그럴 때마다 불편하고, 나를 불편하게 할 의도가 전혀 없었던 간호사는 몹시 당혹스러워한다. 산부인과의 문진표는 단지 이 사회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상식(?)을 반영하고 있을 뿐이다. 또, 내 가족관계 증명서에는 두 아들이 없다. 아들들의 가족관계증명서엔 내가 없다. 우리의 가족관계증명서로는 우리가 가족이라는 걸 증명할 방법이 없다. 따라서 나는 내 아들들이 미성년일 때 아들의 통장 하나도 대신 만들어줄 수 없었다. 남편의 가족관계증명서를 떼어야만 우리 네 식구가 다 드러난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상식(?)이 그런 가족관계증명서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상식은 저 산부인과 문진표나 가족관계증명서와는 많이 다를까?

‘두 아이의 엄마’라는 짧은 문구 하나만 뜯어봐도 내 존재는 이렇게 복잡하고, 나는 이 사회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 누군가를 배제하거나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 쉬운 다수자이면서, 동시에 차별과 배제를 당할 수 있는 소수자다. 여기에 ‘내가 속한 계급, 피부색, 살고 있는 지역, 제1 언어, 몸의 상태, 나이...’ 등을 감안한다면 대체 얼마나 더 복잡해질까?

그러므로 우리 중 누구라도 모든 사안에서,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언어를 구사하고 행동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잘못을 지적받았을 때 실수를 성찰하고, 혹시라도 상처받았을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며, 우리 자신의 잘못을 돌이키는 일은 사실 누구나 할 수 있고 누구나 해야하는 일이다. 때로는 형사처벌이나 조직에서의 퇴출이 불가피한 심각한 범죄도 많지만, 우리의 일상에서 흔히 저질러지는 차별이나 폭력, 성폭력 등의 인권 침해는 더 흔하고 잦다. 후자의 경우, 애초에 저질러진 잘못도 문제지만 정작 문제를 키우는 것은 잘못을 지적받았을 때의 태도다.

정작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군가에게 지적이나 문제 제기를 받는다는 두려움이 아니라 내가 언제든 누군가를 차별하고 배제하거나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혀 왔고 또 입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게 아닐까? 만일 우리가 그것을 흔쾌히 인정한다면, 우리는 때로 지적받고, 욕을 먹고, 때로는 징계를 당하더라도 깨지면서 배우는 일이 훨씬 덜 두렵지 않을까? 그리고 우리는 ‘잠재적’이 아닌 실제 ‘가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타인에 대해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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