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50주기 기념 사진전 인터뷰]
서비스점검원, 김순옥

2020년 전태일 열사 항거 50주기를 맞았다. 전태일 열사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를 외치고 산화했다. 그가 목숨을 걸고 지키려 한 것은 노동자의 권리였다. 노동자의 열악한 현실 고발이었다. 그리고 자신보다 더 열악한, 어린 여성노동자들을 지키고자 했다.
민주노총은 여전히 불평등 속에서 기본적인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을 조명하고자 한다. 전태일 열사 50주기를 맞는 오는 11월, 지금의 여성노동자들을 만나 그들의 현재를 사진전으로 선보일 예정이다. ‘지금, 우리는’. 사진전에 앞서 민주노총이 만난 여성노동자들을 〈노동과세계〉에서 소개한다. [편집자주]

 

“우리는 정말 그림자 같은 존재였어요”

서비스점검원, 김순옥

 

김순옥 서비스연맹 전국가전통신서비스노조 코웨이코디코닥지부 수석부지부장. ⓒ 변백선 기자
김순옥 서비스연맹 전국가전통신서비스노조 코웨이코디코닥지부 수석부지부장. ⓒ 변백선 기자

김순옥입니다. 코웨이 서비스점검원으로 일하고 있어요. 우리가 ‘코디’라고 부르는 일입니다. 코디는 ‘코웨이 레이디’의 준말이에요. 남성 노동자는 코웨이 닥터 준말인 ‘코닥’이라고 불러요.

동시에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전국가전통신서비스노조 코웨이코디코닥지부 수석부지부장을 맡고 있어요. 매주 월요일과 금요일은 현장에 나가고 화~목요일은 서비스연맹 사무실에서 노동조합 업무를 합니다. 노조 설립필증을 아직 못 받았거든요. 그러니 회사와 단체협약을 하지 못해 전임을 인정받지 못했어요. 그래서 한 주를 둘로 나눠 본업도 하고 노조 업무를 하고 있죠. 코웨이코디코닥지부는 1월 31일 설립신고를 했어요. 그런데 석 달이 넘도록 설립필증을 내주지 않고 있네요. (코웨이코디코닥지부는 지난 5월 13일 서울지방고용노동청에서 노조 설립신고증을 받았다. 설립신고서 제출 103일 만이다. 인터뷰는 5월 6일 진행했다. [편집자주])

코웨이 입사한 지 6년 정도 됐어요. 그전에는 다른 일을 했죠. 일반 직장에 다녔는데,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만두게 됐어요. 5~6개월가량 쉬다가 우연히 집을 방문한 코디분을 만났죠. 아무 생각 없이 ‘일할만 하세요?’라 물었는데, 정말 적극적으로 코디를 권하더라고요. 교육을 한 번 받았어요. 그런데 교육비를 받으려면 첫 주에 몇 계정(한 제품 점검)을 처리해야 한다네요? 교육비만 받으려고 했는데, 우리 지국 사람들이 너무 좋아서 남게 됐어요.

사람들이 내 얘기를 들어주고 내 사정에 공감해주더라고요. 제 마음이 한결 좋아졌죠. 다른 데 가기 싫었어요. 종일 각자 다른 곳에서 일하다가도 미팅 때 만나 속 얘기도 나누고 밥도 같이 먹고, 그렇게 한 달 한 달 있다 보니까 지금까지 있게 됐네요.

다른 회사와 다르게 코웨이 코디 조직은 유대감이 끈끈해요. 다른 사람 얘기를 들어봐도 같아요. 일이 힘들지만,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좋아서 버틴다고들 하거든요. 같은 일 하면서 같이 고생하는 사람들과의 연대감, 동지애가 생긴 거죠. 점심시간을 맞춰서 함께 밥 먹고 커피도 마시고, 저녁에는 맥주도 한 잔 나눠요. 간혹 월말에 시간이 날 때가 있거든요. 그럴 때 다 함께 여행도 가죠.

우리는 현장직이에요. 정해진 출퇴근 시간은 없고 고객이 원하는 시간에 맞춰 방문합니다. 보통 첫 출근은 8시 경인데, 경우에 따라 7시30분까지 가야할 때도 있어요. 가장 바쁜 시간은 오후 5~7시예요. 그때 고객들이 퇴근하고 집에 돌아가니까요. “제가 퇴근하면 6시 넘으니까, 그때 오세요” 이런 경우가 많죠. 그때는 빨리 이쪽 집 갔다가 저쪽 집에 가고 그래야 해요.

때론 늦게 방문해달라고 해 찾아가면 가족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화목하게 저녁식사를 하고 있어요. 그런 걸 보면 집에서 혼자 밥 챙겨 먹을 우리 아이들이 생각나기도 하죠. 그때 우리는 많이 느껴요. 처음엔 몰랐는데, 당연한 줄 알았는데…. 우리는 우리 아이들 챙기지도 못하고 매일 늦게까지 일을 했구나. 우린 정말 그림자 같은 존재였단 걸 깨달았죠.

코웨이 서비스점검원도 특수고용노동자예요. 필증이 나오지 않는 것도 우리의 노동자성을 검토하기 때문이래요. 출석 요구에도 응하고 자료를 다 제출했는데도 뭐 그리 검토할 게 많은가 모르겠어요. 노동자성은 원청으로부터 종속성과 지휘·감독을 받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는데, 우리는 늘 유니폼을 입고 머리 길이도 제한되거든요. 손톱이며 립스틱, 양말 색깔까지 규정이 있어요. 그런데 어떻게 코웨이에 종속적이지 않을 수 있겠어요?

방문노동에 종사하는 다른 분들도 비슷할 거예요. 우리 코디들도 코로나19 사태로 너무 힘들어졌어요. 고용보험에 가입된 다른 일반 직종은 유급휴가로 70%를 받거나 정부지원금을 받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거든요. 연차도 없고 수당도 없는 데다, 감염 문제도 발생해요. 고객 집에 방문해서 일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자가격리자인 거예요. 진작에 얘기를 해줬어야 하는 문제예요. 자가격리자 집에 방문한 우리가 위험에 놓이는데, 다른 집에 방문해 점검할 수 없잖아요. 그렇다고 일을 안 하자니 수입이 끊기잖아요. 우리는 한 달 일을 안 하면 다음 달에 쌀을 살 돈이 없는 상황이에요.

이러니 우리도 노동조합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노조가 있으면 아무 말도 못 한 채 당하지도 않을 거니까요. 코디 조직이 1만 명정도 된대요. 그 사람들이 한꺼번에 목소리를 내면 회사가 자기들 마음대로 할 수 있겠어요? 늘 ‘누가 노동조합 안 만드나….’ 그런 생각을 했죠.

지난해 전국가전통신서비스노조에서 코웨이를 조직할 때 설명을 들으러 갔어요. 누군가 주체가 돼 간부로도 나서고 출마도 해야 한 대요. 우리 지국에서 10명이 갔는데, 누구도 나서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나섰어요. ‘제가 할게요!’ 준비위원회 2~3번 한 뒤 11월 2일 총회를 했어요. 그 사이에 몇 번이나 생각했던지 몰라요. ‘나 지금 뭐 하고 있지?’

그렇게 노조를 시작했어요. 계속 새로운 경험을 했고 도전을 해왔고 없는 길을 만들어왔죠. 몇 개월 안 됐지만 노조를 하는 매 순간이 기억에 남을 거예요. 가지 않은 길을 하나하나 만들어가고 있거든요. 우리가 만드는 게 역사라고 생각해요. 다른 노조는 역사가 오래됐으니까, 누군가 간부로 출마를 해 기존의 노조를 이어가는 구조라면 우리는 노조 설립필증 하나 받는 것부터 시작해 모든 것을 투쟁하고 싸우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그만큼 하나 하나가 다 성과이기도 해요.

며칠 전 누가 물어보더라고요. ‘노조에 가입하면 어떤 혜택이 있나요?’ 솔직하게 말했어요. ‘지금 (노조에) 들어오면 혜택이 없다. 그러나 혜택이 돌아가게 할 거다. 개인 한 명 한 명이 선구자가 돼 바꾸겠다고 나서야 우리가 회사에 당당히 얘기할 수 있다.’ 그렇게 말했어요. 지금 1만 코디코닥 중에 우리 조합원은 3천5백 명 정도거든요. 이들이 연대하면 어떤 힘이 날까요? 이 3천5백 명이 1만 명이 되면 또 어떤 힘이 나겠어요? 그렇게 얘기했어요. 한 사람 한 사람이 나서야 한다.

오늘 아침에 그분 연락이 왔어요. 노동조합에 가입한다고.

우리는 우리가 당연히 코웨이 직원이고 노동자인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노조를 만들고 보니 우리는 노동자가 아닌 개인사업자인 거예요. 사업자 번호도 없는 개인사업자. 제3의 계급 같았어요. 사용자, 노동자 그리고 특수고용노동자. 같은 노동을 하고 있어도 노동자가 아닌 거죠.

우리가 노조를 만들려는 이유요? 회사에 해를 입히려는 게 아니에요. 코웨이가 새겨진 유니폼을 자랑스럽게 입고 회사와 함께 상생의 길을 걸어가고 싶은 거예요. 누가 코웨이를 지금의 1등 기업으로 만들었겠어요. 우리 코디코닥이 코웨이를 끌어온 거예요. 이들이 다시 뭉쳐 회사와 상생하는 길로 가겠다는 데 왜 그 길을 막는지 모르겠네요.

전태일 열사가 어린 여공들 고생하는 걸 대변해주고 싶었다고 하잖아요. 저는 지금 우리 코디코닥 노동자들, 그리고 특수고용노동자들이 그때 그 어린 여공과 같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다시 전태일이 나타나 우리를 위해 싸워주면 좋겠어요. 50년 전과 지금은 세상이 달라졌고 시간도 많이 흘렀지만, 소외계층을 만들고 그들을 차별하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거든요.

수석부지부장 임기는 3년이에요. 임기가 끝나면 간부로서의 활동을 끝나겠죠? 그래도 노동조합은 계속해나갈 거예요. 우리는 그림자 같은 존재였다고 했잖아요. 그러니 빛을 바라볼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전태일 열사가 생각나죠. 길을 잃거나 앞이 보이지 않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마다요. 어린 나이에 어쩜 그리 용감하고 강인할 수 있었는지….

인터뷰 송승현 / 사진 변백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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